고3 학생들이 대학 수시 원서를 쓴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갈림길이다.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려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다른 친구의 선택이 아무리 부러워도 내가 갈 수 있는 데만 갈 수 있는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지금부터는 현실이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냉정하다고 말하는 그 현실 말이다. 지금부터의 삶을 위해서 그동안 돌봄을 받으며 어른들의 그늘 안에서 성장해 왔던 것이다.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각자의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지난 20년, 그 시간이야말로 영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자란 토양, 내가 받은 고마운 것들, 내가 숨 쉬고 듣고 보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의 결정체로 빛을 가진다. 나는 빛을 품은 여행자가 된다. 세월이 키운 '자신'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가 내 의지가 되고 내가 그의 주체가 되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멀리 다녀올 수 있다. 용기가 있어야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 현명해야 깊은 곳에 닿고 온화해야 거친 곳을 헤쳐나갈 수 있다. 아무도 어디로 갈지 그곳이 어딘지 가르쳐 줄 수 없다. 초라하면 초라한 나를 견뎌야 한다. 두렵고 무서움에 떨어야 할 수도 있다. 막막함으로 뒤덮이는 절망도 있다. 삽시간에 쏟아지는 차가운 빗줄기에는 속수무책이다. 견디고 떨면서 절망하는 일, 그것도 삶이다. 비만 내리는 어떤 하루살이의 일생도 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내 행복이 정의인 것처럼 내세울 것도 없다. 타인의 불행을 거울삼아 경계하는 일은 욕심이 시킨 일이지 불안 때문은 아니다. 사람의 불안은 성스럽기도 해서 서로를 위할 줄 안다. 다만 믿고 가기를 바란다. 자신 있는 '자신'을 데리고 가는 길에서도 자신 없는 '자신'을 얼마든지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과 자신 없는 '자신'과 함께하는 그대는 이미 자신 있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