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할아버지의 일기를 마주하다.

침대 밑 일기장의 부활

by 나루

이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나의 간호학과 진학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고등학생 때 나는 명확한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성적에 맞춰서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2021년, 그렇게 나는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간호학과 학생은 3~4학년에 걸쳐 총 1000시간의 임상실습을 해야한다. 실습이란 병원에서 사례 대상자의 질환을 공부하고 간호를 관찰/감독하에 시행하는 교육과정이다. 한 학기에 2달 정도, 하루 8시간씩 실습을 하기 때문에, 실습은 그 당시 내 일상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2023년 겨울쯤에 나간 지역사회간호학 실습은 병원이 아닌 요양센터에서 했기에 유독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하루 9시간, 점심시간을 빼도 8시간 동안 어르신들과 함께 있는 게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차 적응이 되었다. 나는 어르신들께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말동무를 해드렸다. 만약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거나 발음을 잘 알아들을 수 없더라도 열심히 맞장구를 치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평소처럼 실습을 하던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요즘 말로는 '현타'가 왔다.


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놀아본 적이 없는데,
지금 모르는 할머니들이랑 뭐 하고 있는 거지?



왠지 모르게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착잡했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깝기 때문에 더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 설날, 할머니댁에 갔을 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괜히 말을 더 붙였다. 괜히 할아버지 방에도 슬쩍 들어갔다. 솔직히 무슨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어서 고민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일기를 오랫동안 써오셨다고 들었던 게 떠올랐다.

설날이 있기 전 아빠 생신날, 할아버지는 아빠께 [아들이 태어난 날에 적은 일기]를 찍어서 보내주셨다. 벌써 50살이 넘은 우리 아빠는 그 사진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었다.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할아버지, 일기는 예전부터 매일 쓰셨어요?”라며 여쭤봤다.

“그렇지. 젊을 때부터 맨날 썼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가 매일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10대 후반, 소년일 때부터 적었다는 사실을.


소년이 80대의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몇십 년간 이렇게 꾸준히 일기를 적은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당장 나부터도 신년계획으로 “매일 일기 쓰기”를 다짐했었지만 매번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역사책 같기도 한, 오래된 여러 개의 일기장들은 나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나 죽으면 이것도 다 버려야지...”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 이야기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하는 걸까?

...


그래서 문득, 이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다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중한 기록들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나를 행동하게 했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책과 그닥 친한 사람도 아니기에 이 작업이 꽤나 어려울 거라는 건 예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2025년 5월부터, 생각만 하던 일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일기장들은 할아버지 침대 밑에 먼지가 쌓인 채 잠들어있었다. 꺼내서 보니, 1962년, 1968년, 1970년의 일기장 이후에 다시 2001년 이후의 일기장이 있기까지 30년의 공백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때도 계속 일기를 적으셨지만, 살면서 이사를 다니고 이런저런 이유로 잃어버렸다고 하신다. 또, 더 어릴 때의 일기장은 누군가 용변 닦을 때 찢어서 쓰는 바람에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휴지와 종이 모두 귀해서 일어난 웃픈 일이다.

기록에 공백에 있더라도, 그 시간들을 모두 열심히 살아내셨기에 할아버지의 오늘이 있을 것이다. 남아있는 할아버지의 일기장으로, 손녀로서 할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보며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브런치북 <손녀가 펼친 할아버지의 일기장>은 매주 월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