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못 먹어도 어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여유 가지기.
뉴질랜드 하면 청정한 자연, 풀밭을 뛰어노는 양, 여유로운 일상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직접 와서 경험한바, 정말 어느 정도 상상했던 것들이 들어맞았다. 버스를 타고 몇 분만 나가도 도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볼 수 있고, 거기서 조금 더 멀어지면 가축들이 풀밭을 누빈다. 동네 카페에 가면, 특히 주말이면, 커피 한 잔과 간단한 식사를 함께하며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뉴질랜드에서 이런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조금만 늦장을 부려도,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줄어든다. 뉴질랜드 카페는 보통 새벽 일찍부터 열어서 오후 2-3시면 문을 닫고, 상점도 일찍 문을 닫는다. 그렇다고 다른 놀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미리 계획했던 대로 하루가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즉흥적인 면모가 있으면서도, 한 번 계획한 것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못 견뎌 하는 성격인데, 처음 뉴질랜드에 와서도 그런 점 때문에 힘들었었다. 살아가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고, 그걸 내가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데서 일이 터지고, 이걸 예측할 수도 없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문제 발생은 언제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당시에는 왜 이런 일들이 생기나 원망스러웠는데,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 본 경험들은 오히려 살아가는 데 있어 거름이 되었다. 이제 문제 상황이 발생해도 금세 부정적인 감정을 정리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고, 지난 해결 사례들로 힘입어 어떤 문제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나에 대한 강한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일상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하루도 제법 즐거웠다. 무엇보다 주말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많이 누그러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쉬는 날에도 나를 몰아붙였던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피곤하고, 나가서 햇볕을 쫴야 행복한 사람인데, 일찍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나가서 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늦잠을 잤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왜 나는 부지런하지 못할까?'라고 자책하며, 따분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임에 기운이 쭉 빠졌다. 따져보면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내 취침 시간과 주중의 체력 소모를 고려했을 때, 딱 적당한 시간대였는데도 말이다. 단지, 내가 재밌겠다고 생각한 일들을 하기에는 조금 애매했을 뿐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나의 즐거움은 외출이었으니, 몇 시에 일어났든 입고 싶은 옷을 골라 입고, 거리로 나섰다. 무작정 걷다 보니, 구경하고 싶게 만드는 상점, 익숙한 동네의 모습과 조그만 새로운 변화들, 푸르른 하늘, 평소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멈춰 서서 쉬어가는 것은, 잊고 있었던 나의 행복이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원래 나는 이런 것도 좋아했었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나는 살아가는 것이 다시 즐거워졌다. 생에 대한 만족도의 일정 부분은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꼭 특별한 일이 아니라도, 산책 겸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오고, 봐온 재료로 음식을 해 먹고, 동네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는 그런 소소한 일상에서도 말로 표현 못 할 행복함을 느꼈다. 작은 즐거움부터 찾고 나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생기기도 했고, 즐길 수 있는 활동의 범위가 넓어졌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이라, 나는 이전에도 행복한 사람이었고, 마침내 그것을 깨달아서 기쁘다.
낯선 나라에서 나는 성장해 갔다. 특히 나에 대해 많이 알아갔다. 이 슴슴하고 아름다운 나라는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했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음식이 입에 맞았고, 요리를 해 먹는 것도 즐거웠다. 다인종 국가기 때문에 집 근처에서도 다양한 나라 음식을 먹어볼 수 있었고, 새로운 식재료를 요리해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언젠가 한국에서 방학을 보내고 다시 돌아왔을 때 공항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Welcome to your home.", 그 말을 듣는 순간,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같이 놀러 다닌 친구들, 처음 동네 구경을 시켜준 친구, 택배 나르는 것을 도와준 청년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설레어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정말이지 오랜 기간 머문 것도 아닌데, 나는 뉴질랜드에 올 때마다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제2의 고향처럼.
지금부터 나는 때로는 부지런하고, 때로는 여유롭게 누비고 다닌, 내가 사랑했던, 여전히 마음에 담고 있는 뉴질랜드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