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지 않는 벽, 멈춰지지 않는 발걸음

<휴스턴, 문제가 발생했다>

by 나루


무용수 여럿이 벽을 향해 걸어간다. 벽이 몸 앞으로 바싹 다가왔을 때 살짝 맞대어 보곤 했던 몸동작은 점차 커지고, 부딪히는 파열음은 거세진다. 멀리서 도움닫기를 하듯 점점 힘차게 벽을 향해 달려간다. 이어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로 미루어 보아 꽤나 아플 텐데도, 끊임없이 부딪힌다. 벽을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에는 말소리가 섞였다. "다시." "네가 뭔데!." 여러 사람의 동시다발적인 발화는 말의 의미를 지워 버렸다. 웅성이는 소리, 불안감을 주는 배경 음악, 벽과 부딪혀 나는 소리가 뒤섞여 허공에 아무렇게나 엉겨 붙는다. 온 신경이 무대로 집중되었다. 몇 번이고 벽을 향해 달려 나가던 그들은 드러누웠다. 드러누워서 팔다리를 파닥거린다. 아ㅡ 차가운 바닥에 뼈가 부딪혀 나는 건조한 소리.


벽을 향해 달려 나가는 행위의 간극을 메우는 장면들은 극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꽃, 펜싱 마스크, 책, 엽서 등 자신의 앞에 놓인 물건들을 끊임없이 만지는 사람들은 무언가 강박감을 가진 것만 같았다. 개개인의 취향이자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무용수들은 또다시 벽을 향해 달려 나간다. 쾌감이 느껴졌다. 공연 전부터 나는 이 장면을 유독 보고 싶었다. 나 또한 꽉 막힌 벽을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다고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걸 알면서도 벽 너머 세상이 궁금하여 꿈쩍도 하지 않는 벽에 나를 부딪쳐 갔다. 벽에 부딪힌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기도 할뿐더러, 나는 나 자체로 살아갈 뿐,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제삼자, 즉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존재가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벽에 부딪힌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 내가 맞닥뜨린 것이 정말 '벽'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벽을 향해 달려 나가는 모습을. 공연 속 무용수들이 벽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모습은 마음속 무언가를 불쑥 건드렸다. 더불어, 벽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벽은 실재하는가?, 실재한다면 무엇일까?,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무용수들은 계속해서 벽으로 달려갔을까?' 이 물음에 대한 절대적인 해답은 없을 것이다. 작 중 여러 장면도, 명확한 답을 주입하기 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일례로, 분위기가 전환되며 무용수들이 일렬로 멋지게 걸어 나오는 장면이 있다. 모델을 방불케 하는 힘찬 걸음으로 이들은 머리 위로 플랜 카드를 펼쳐 들며 전진한다. “친절하게 살자” 같은 교훈적 메시지가 적힌 카드도 있었지만, 어떤 카드는 극과 전혀 상관없는 문구를 담고 있었다. 같이 공연을 본 동료는 이 장면을 여러 번 곱씹었다고 고백했다. 화려한 워킹과 멋진 표정에 비해 어딘가 싱거운 메시지가 별거 아닌 일에도 살을 붙여 키워낸 가십 같다고 했다. 겉은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알맹이 없이 실체 없는 이야기 마냥. 그렇게 생각하니 극 중의 벽 또한 허상 일 수도, 실재할 수도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벽은 결국 됐을까? 무용수들의 결의에 감복하듯 무너졌을까?


극의 마지막 장면은 이에 대한 대답을 영화 달콤한 인생의 대사로 풀어내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말은 현실적이었다. 벽은 끝내 부서지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든,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는 꿈이든,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생각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무용수들은 달려 나간 것일까? 나는 그것을 ‘목소리를 내는 행위’로 이해했다. 부서지든, 넘지 못하든, 일단 몸이 부서져라 내 존재를, 내 의견을 표하는. 작품명 “휴스턴, 문제가 생겼다(Houston, we have a problem)”는 달로 향하던 아폴로13호가 위기를 직면했을 때 보낸 무전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아폴로 13호에 탑승한 우주 비행사들은 달로 가는 본래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산소 탱크가 폭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귀환이라는 결정은 벽을 향해 나아간 용기 있는 전진이었다. 이 작품 역시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관에 따라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는 인간의 몸짓을 담아냈다.


제28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2025)의 주제는 ‘광란의 유턴’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현시대가 후퇴하고 있을 때 우리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다수의 걸음에 발맞춰 나도 모르게 스스로 벽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용의 언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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