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파도처럼 — 앨런 길버트와 NDR 엘프필하모니

앨런 길버트의 철학이 만든 몰입의 프로그램, 그리고 벨의 섬세한 해석

by 나루


브람스의 계절, 완연한 가을에 브람스의 고향 함부르크에 기반을 두고 있는 독일의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한국을 찾았다. 2023/24 시즌 상주 음악가로 활동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함께하며, 악단과 쌓아왔던 케미스트리를 자랑했다.

공연의 시작을 열었던 것은 한국 초연작인 안나 클라인의 '요동치는 바다'였다. 강력한 오프닝 이었다. 예기치 못한, 발 구르는 소리가 첫 박을 장식하고, 관객들의 상기된 표정이 넘실대는 선율을 표류했다. 단원들은 때로는 기합을 넣고, 노래를 부르며 음악을 끌어냈다. 5분가량의 프로그램은 짧지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요동치는 바다'는 여성 지휘자 마린 알솝을 위해 쓰인 곡이다. 알솝의 크리스탈 어워드 수상을 기념해서 쓰인 이 곡은 오드리 로드의 '여성은 말한다'라는 시에서 영감을 받아 출발한다.

달에 새겨지고 태양에 닿은
내 마술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가 뒤로 물러갈 때
그것은 나의 형상을 남길 것이다
나는 머물지 않는다
내 탄생이나 신들 속에서도
나는 불멸이며 반쯤 자란 존재
그리고 여전히 찾는다
나의 자매들과
마호메이의 마녀들...(중략)

이 시는 존재가 불투명해 왔던 여성을 조명한다. 로드는 이 시에서 기록되지 않았던 그들이 사실은 원초적이고 신화적인 힘이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선언한다. 그 선언은 클라인의 '요동치는 바다'에서 마침내 형상화된다. 연주자에게 부여된 원초적인 힘은 요동치는 바다가 되어 끊임없이 꿀렁였다. 그러다가 단원들은 마지막 박을 마무리 함과 동시에, 일제히 객석을 보며 미래를 향한 메시지를 남긴다.

조슈아 벨_(c) Phillip Knott

첫 곡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조슈아 벨이 등장했다.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슈아 벨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어떨지 기대가 됐다. 초반에는 조슈아 벨 개인의 연주도, 오케스트라와의 호흡도 살짝 불안정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농익어가는 음악은 자연스러운 몰입을 이끌었다. 자신의 선율을 이끌어가면서도, 전체적인 음악의 흐름을 생각하며 계속해서 단원들과 합을 맞춰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 바이올린 솔로 뒤에 바로 이어 나오는 파트가 많았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와 벨이 물아일체가 된 듯한 꽉 찬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2악장은 오보에의 선율로 시작된 아름다운 선율이 전체 주제를 이어 나갔다면, 3악장은 빈틈없는 활력으로 가득 찼다. 벨은 과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해석했다. 이는 앙코르 연주에서 보여준 이자이에서도 드러난다. 벨은 리듬을 뒤로 많이 붙이지 않고, 거의 정박으로 연주하되, 그 뉘앙스는 완벽히 담아냈다. 테크닉이 집약된 이자이를 어떠한 제약 없이 자유로이 연주하는 모습은 브람스 콘체르토와는 사뭇 다른 감동을 선사해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NDR 엘프필하모니 ©Thomas Kierok

NDR 엘프필하모니의 연주를 들으며,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7번에 대한 기대가 샘솟았다. 이 때까지 들어왔던 오케스트라와는 소리가 남달랐다. 전체적인 음악에서 어느 악기군 하나가 도드라지는 것이 아닌, 균형 있는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드보르자크에서도 역시 그런 오케스트라의 조화로움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는 앨런 길버트의 지휘 또한 인상 깊었다. 악장마다, 혹은 하나의 악장에서도 캐릭터가 바뀔 때마다 지휘자가 이를 잡아내서 끌어내는 듯 보였다.

교향곡은 1악장부터 천천히 피날레를 향해 달려갔다. 곡의 전개 과정을 보는 것이 재밌었다. 3악장 스케르초는 다른 악장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었는데, 6/4박자의 반주 리듬과 2/3박자의 선율이 함께 만들어내는 충돌과 시너지가 곡에 긴장감과 유쾌함을 동시에 불어 넣었다. 4악장은 다시 1악장의 어두운 색채를 가져와서는 이내 역동적인 에너지로 나아갔다. 특히 이때 ,각 악기군, 오케스트라의 시너지가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악장의 끝 마무리에서 음악은 장조로 전환되며 종결된다. 오케스트라의 앙코르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이었다. 클래식한 레퍼토리지만, 이는 또한 언제나 사랑받는 곡임을 뜻하기도 한다. 기대에 부응한 듯, 곡 초반부에 박자에 맞춰 박수가 나왔고, 이는 음악과 어우러지다가 점차 잦아들며, 온전한 음악으로 흡수됐다.

앨런 길버트 ©Marco-Broggreve

올해 갔었던 공연 중 제일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운이 많이 남는 공연이었다. 일단 프로그램 자체가 조화로워 끊김이 없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강력한 오프닝으로 무대에 대한 집중도가 확 올라갔을 때, 조슈아 벨이 캐릭터가 분명한 브람스와,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이는 이자이를 들려주었고, 또 다른 낭만주의 거장 드보르자크의 곡을 통해서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온전히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몰입도 있는 프로그램 배치는 지휘자 앨런 길버트의 철학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곡의 장르와 상관없이 '서로를 비춰주는 작품들을 함께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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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은 균형, 조화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음악은 악기군별로, 그리고 이내 모든 악기가 하나의 파도처럼 어우러져 실내악을 연주하는 듯했다. 더불어 프로그램은 각 음악 (=에피소드)를 연결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다. 누구하나 튀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존재감을 돋보인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행보가 기대되는 바다.

*이 리뷰는 앨런 길버트 &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프로그램 북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8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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