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 비니쿤카
새벽 두 시 반, 모두가 잠든 시간 비니쿤카(Cerro Colorado Vinicunca)에 오르기 위해 서둘러 준비했다. 지대가 높아 추울 수도 있다는 말에 배낭 깊숙이 잠들어있던 히트텍과 패딩을 꺼내 입었다. 여행 일주일 만에 드디어 제 역할을 하는 나의 경량 패딩. '짊어지고 다닌 보람이 있구나.'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니 투어가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곳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물론 직업 특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남미 특유의 순수함이 물씬 풍긴다.
생각보다 매서운 바람에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텅 빈 버스 안, 오늘은 또 어떤 다양한 인생들이 이곳에 담길까 내심 기대되는 마음을 안고 출발했다. 어느새 버스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로 가득 찼다. 'Buenos días'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침 인사를 건넨다. 모두 이른 새벽인데도 활기가 넘친다. 그러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까마득한 새벽에 취해 잠에 들었고 버스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3시간 정도 달렸을까. 굽이굽이 아찔한 벼랑 같은 산길을 지나 드디어 비니쿤카 입구에 도착했다.
비니쿤카는 페루 쿠스코 지역에 있는 고산 언덕으로 무지개 산으로도 불린다.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관광 지역으로 해발 5000m가 넘는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찾곤 한다. 대개는 산 중턱까지 말을 타고 간다. 나 역시 예약해둔 말을 타기 위해 가이드를 따라갔다. 오늘 함께 산을 오를 일행들과 다 같이 손을 마주 얹고 'Vamos!'를 외쳤다. 국적은 다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한마음이다. 저 거대한 산을 무사히 정복하고 귀환하자는 것.
말을 타고 한 시간 정도 산을 올랐을까.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와 굽이진 산길이 반복된다. 말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나 보다. 저 높은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덜라는 건지 말이 이동하기 어려운 마지막 구간은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꽤 가파른 언덕이 이어졌다. 고산병을 견디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조금씩 호흡이 가빠왔다. 차가운 칼바람에 귀까지 멍해졌다. 이대로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정상을 향해 전진할 것인가. 후- 거친 호흡을 고른다. 그리고는 올라오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등 뒤의 풍경을 두 눈에 담는다. "와-" 짧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더 멋진 순간을 담기 위해 다시금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걸로는 부족했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더 힘을 내어 본다.
"자, 내 손 잡고 올라와. 거긴 위험해."
기꺼이 내어준 누군가의 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오늘도 역시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모든 이들이 서로 응원해주고 험한 길에선 서로의 손을 내어준다. 이 때문에라도 정상에 가야 한다.
"남미는 힘들지 않고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 거야?"라며 볼멘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만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없지. 그래서 우리는 계속 오르는 거야. 사진으로 보는 건 직접 눈에 담는 것만 못해." 누군가 답했다.
숙소를 나온 지 9시간 만에 정상에 닿았다. 눈앞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큼의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에서의 여행은 매 순간이 감탄이다. 궁금했다. 이 깊은 산속에 있는 보물을 누가 제일 처음 발견했는지. 누군가의 노력과 누군가의 의외의 신선과 누군가의 호기심이. 시간의 여백을 타고 흘러 현재의 나에게까지 닿았다.
여행은 늘 그렇다. 시공간을 초월한다.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지금 내가 이곳이 있는 이유다. 가는 시간이 아까워 눈과 마음에 그리고 카메라에 풍경을 원 없이 담았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돌아가는 버스 안,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기절했다. 그러나 이 순간 모두 알록달록한 무지개 위를 나는 꿈을 꾸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높고 맑다.
오늘은, 조금은 특별한 그래서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이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