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 쿠스코
쿠스코 :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에 있는 도시
남미 여행은 이동 시간이 반이라고 했던 말을 몸소 체험 하는 중이다. 이카(Ica)에서 쿠스코(Cusco)까지 버스로 18시간. 아무리 잠을 자도 자도 끝나지 않는 이동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오전에 출발해서 한 번의 밤을 맞이했고 또다시 해가 떴다. 버스에서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재촉하듯 나를 깨우는 강렬한 햇살에 커튼을 쳐내고 서리 낀 창문을 쓱 닦았다. 어느새 창문 밖으로는 구름 덮인 산들이 가득했다. 감탄도 아주 잠시. 높은 도로를 올라갈수록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과 조금씩 어지러워지는 머리, 답답해지는 가슴. '아-이게 말로만 듣던 고산병인가?' 서둘러 알약을 하나 집어삼키며 정신을 다잡았다. 지난 14시간의 이동보다 마지막 4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약 기운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눈앞에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이 안 되는 풍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높은 곳에 찻길을 내었는지, 어떻게 마을이 만들어졌는지. 내가 지금 하늘과 같은 높이에 와있는 게 맞는지 믿을 수 없었다. 빨리 버스에서 내려 온전히 풍경을 담고 싶었다.
내가 그리던 페루의 풍경이었다. 높은 산 위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 드넓은 초원, 푸른 하늘, 알록달록한 전통의상을 입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 그곳에 섞여 있는 각국의 여행자들.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갑자기 무채색 가득한 내 옷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의 행세가 이곳과 몹시 어울리지 않다고 느껴졌다고나 할까.
여전히 꾸밈 많고, 시선에 의식하며 저들 사이에 동화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까지 '나는 아직 자연스럽지 못한가 봐' 여행을 떠나왔음에도 버리지 못한 무언가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내려놓지 못하게 만들었던 걸까.
무서운 건지, 두려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 자신이 없는 건지. 복잡미묘한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얼굴에 치덕치덕 발라댄 화장품을 손으로 쓱쓱 몇 번 문질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질끈 높게 묶었다.
"내일은 더 부딪혀야지. 깨여야지. 그리고 자연스러워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