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 상파울루
남미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는 브라질 상파울루다. 출발 전부터 비가 내리더니 도착하는 순간까지 먹구름이 줄곧 따라 다졌다. 버스 안을 가득 채운 습한 기운을 에어컨 바람으로 덮었다. 약간은 한기가 도는 공기에 겉옷을 잔뜩 여민 채 잠이 들었다.
번쩍.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먹구름 가득한 상파울루는 지금까지의 도시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날씨가 내 마음을 따라가는 듯했다. 또다시 거센 소낙비가 내렸다. 거리의 사람들은 우산 없이 걸었다. 비가 곧 그칠 거라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듯.
우산도 없이 배낭을 짊어지고 숙소로 향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찬바람에 잔뜩 몸을 웅크렸다. 한 방울 두 방울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이 도심의 냄새와 뒤섞였다. 아직은 추억이라 칭하기 힘든 시간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내리는 빗속을 걷고 또 걸었다. 비가 계속 내려 비행기가 뜨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마지막 목적지라 그런지 도시의 모든 풍경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이곳에서 나는 지난 몇 달간의 여행을 정리해볼까 한다. 숙소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노트를 꺼내어 떠오르는 이름들을 무작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한식당을 찾았다. 식당에 안은 구수한 냄새로 가득했다. 곧 있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된장찌개였지만 이상하게 이곳에서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팍팍해진 서울 도시에서 당연하듯 먹는 그런 된장찌개 말고, 누군가의 정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된장찌개. 이 마음을 돌아가서도 잊고 싶지 않아 이곳을 찾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수저 한가득 퍼 국에 말았다.
그리곤 노트를 다시 꺼내어 조금 전 적다만 이름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행 중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쉬운 듯 쉽지 않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인연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나의 것을 챙기기 바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며 살았다. 함께 나누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혹은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했다. 매번 가시를 세우고 누군가의 가시에 찔리지 않게 노력했다. 혼자만의 시간에 외로워하다가도 사람의 익숙함이 지쳐 지겨워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도 복잡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여행은 그런 마음에 봄바람이 불어오듯 조금의 공간이 만들었다.
아주 작은 것들이지만 먼저 나누게 되었고, 먼저 웃게 되었다. 누군가의 시간 속에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되려 그들이 나에게 더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주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졌다.
이름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함께한 시간을 마음속에 새기는 과정이 아닐까. 함께 웃고 공유하며 우리는 진정으로 ‘함께’ 일 수 있었다. 비로소 같아짐을 느꼈다. 나의 부족함과 나의 나약함과 나의 빈틈을 채워 준 건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혼자서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오만으로 무너져 내릴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건 그들의 미소였고 여유였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붙잡아가며 적고 또 적었다.
기수, 재민, 가령, 하늘, 하라, 속은, 진주, 자연 세르게이, 오아르, 진영, 동후, 은혜, 상현, 선희, 현주, 지혜, 차차, 은별, 한민, 다현, 지현, 이사벨라, 나은, 태순, 준희, 진수, 중휘, 아마우리, 정원, 준혁, 태훈, 규진, 관희, 종원, 운영, 파비안, 세리, 마르셀리, 조나단, 제이슨, 기든, 모아, 숀, 승현, 수진, 혜진, 인희, 모르간, 규민.
그리고 꽃잎 마냥 흩날리던 나의 순간에 새겨진 모든 이름.
이들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적고 나니 나의 여행은 그들에게서 전염된 행복으로 매순간 기쁨이 넘쳐나는 날들이었음을 깨달았다. 힘들고 지치던 순간에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나누며, 그들을 통해 받은 만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함께. 그래. 그렇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