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쯤이야

영국 : 런던

by 나린

듣던 대로 런던은 소나기가 잦다. 벌써 세 번째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첫날에는 습관처럼 비가 내릴 때마다 우산을 펼쳤다.


다행히 오늘은 비 소식이 없어 과감히 우산을 캐리어 깊숙이 집어넣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가. 날씨가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런던이 아니었던가. 아니나 다를까 이내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동생은 볼 위로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닦아내며 '이제 이 정도는 멋있게 맞을 수 있는 정도야." 하고 말했다. 그의 말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동생과 여행을 계획했을 때 이유는 달랐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가고 싶어 했던 나라가 영국 런던이었다. 나에게 영국은 첫사랑 같다. 첫사랑의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미화 되지만ㄴ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된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때 우중충한 날씨와는 사뭇 대조적인 그들의 친절함에 놀라곤 했다. 모두가 그렇진 않았더라도 삭막한 도시라는 말만 들어왔던 나에게 한 줌의 친절은 그 어떤 친절보다 강렬했다. 무엇보다 나는 런던의 새빨간 이층 버스가 좋았다. 첫눈에 반하기라도 하듯. 회색 도시에서 유일하게 색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고 할까.

아주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그 어떤 사랑보다 강렬한 소나기 같은 첫사랑.

나에게 런던은 그랬다.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이는 빗줄기에 눈앞에 보이는 상점으로 서둘러 몸을 피했다. 덕분에 오늘의 일정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그칠만하다가도 다시금 거센 비바람이 분다. 이대로 있다간 해가 저물어 그대로 숙소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동생에게 말했다.


"그냥 비 맞을래? 이 정도는 괜찮다며."

약간의 침묵 끝에 동생이 답했다.

"........... 그래, 그냥 가지 뭐."

우린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괜찮지?"

"응, 괜찮아."


사실 한 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우리 남매는 몹시 다르다. 여행 스타일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힘들면 쉬어야 하고, 가고 싶을 때 가야 한다. 하지만 동생은 힘들어도 가기로 한 곳이 있으면 가야 한다. 예측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도 달랐다. 덕분에 동생은 즉흥성이 강한 누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이었을 테고 나는 계획한 대로 움직여야 하는 동생 때문에 나름의 애를 먹었다. 물론 그마저도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머리에 맺힌 물기를 두어 번 털어내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이번 런던 여행에서는 유독 미술관과 박물관을 많이 다녔다. 정반대의 우리지만 둘 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린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담는다. 동생은 도착하자마자 지도와 책자를 펼치고 하나씩 차분히 읽어 내려간다.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후에야 관람을 시작한다. 머리로 이해되는 작품의 가치에 중점을 둔다. 나는 발길이 닿은 곳으로 향한다. 그러다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작품이 생기면 그제야 책자를 펼쳐 찾아본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작품에 대해 조금 더 가치를 둔다.


한참을 고요히 작품을 감사하다가 동생에게 말을 건넸다.


"이거 너무 멋있지 않아?"

"그렇네."


무미건조하다 못해 딱딱하다.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나와는 달라 동생은 신기하리만치 차분하다. '어떻게 이런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지?'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맛있는 건지 맛이 없는 건지. 그래서 동생과의 여행에서 나는 늘 질문이 많아진다. '어땠어?', '뭐가 제일 좋았어?'

방법이 다르다 보니 세상을 해석하고 느끼는 속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가끔은 동생의 속도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눈에 훤히 보이는 결과를 향해 세상 느린 속도로 걸어가고 있으니, 이미 저 끝에 도착해 있는 나는 기다리다 지쳐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가도 나의 속도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있는 동생을 보며 기다리고 인정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언제였던가 처음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 야경을 보기 위해 산에 올랐던 적이 있다. 동생은 군말 없이 산을 올랐다. 온종일 고된 일정으로 다음에 다시 오자는 나를 두고 산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갔다. 결국 어두운 저녁에 홀로 남겨있기 무서웠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 올랐다. 정상에 도착해 화려한 야경을 보고 나서야 동생이 말했다. '오길 잘했지?' '응. 예쁘긴 하네.' '거봐. 내일은 날씨 안 좋대. 그리고 내일은 다른 곳 가야 해서 못 와. 오늘 아니면 못 보는 거야.' 그의 말에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을 더 아름답게. 순간을 완벽한 순간으로, 조금 더 후회 없이 남기는 동생만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시간 남짓 박물관 감상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갠 맑은 하늘이 우릴 반겼다.


"배고프니까 밥 먹자."

"그래, 오늘은 아무 데나 가도 괜찮을 듯."

"웬일이래."

첫날 '이렇게 많은 서양인 사이에 있는 게 태어나 처음이야.'하고 경직된 얼굴로 말하던 동생의 얼굴에서 제법 편안함이 묻어난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조금은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래, 뭐든 괜찮았다. 조금씩 이곳의 냄새, 공기, 날씨, 모든 것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우린 각자 의외의 공간과 상황 속에서 한 템포씩 쉬어간다.


누군가에게 열정보다는 차분함으로 채워진 여행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차분함보다는 유쾌함으로 채워진 여행 일터.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요함의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그것은 세상을 대하는 저마다의 방식이기도 하다. 인생은 결국 내가 좋아하는 느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본다.

새빨간 버스에 올라탔다.

툭툭. 동생의 어깨를 치며 오늘도 나는 묻는다.

“오늘의 여행은 어땠어?”

그리고 동생이 묻는다.

“내일은 뭐 할 거야?”

내일? 내일은….

버스가 덜컹. 그 움직임에 몸을 맡겨본다.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가는 거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다시 비가 내린다. 괜찮다. 곧 그칠 비일 테니.

그러니 소나기야 얼마든지 맞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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