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 피츠로이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여행이 주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
25시간이라는 긴 버스 여정 끝에 바릴로체에서 엘 찰텐으로 도착했다. 이곳 엘찰텐에 온 목적은 불타는 고구마라 불리는 피츠로이(Cerro Fitz Roy)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피츠로이를 보기 위해 온 여행객들로 넘쳐난다. 도보 여행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캠핑 장비를 빌리러 렌탈샵으로 향했다. 여행 중 많고 많은 트레킹 했지만, 텐트까지 챙겨 숙박하는 트레킹은 처음이었다. 산은 쉽게 품을 내어주지 않는다던데 걱정이 앞섰다.
장비를 빌리고 문밖을 나서려는 찰나 주인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피츠로이를 오르기 가장 좋은 날씨에 왔다며 양손을 힘껏 흔들어 보였다.
"You're So lucky girl!"
피츠로이(Cerro Fitz Roy)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 안데스산맥에 있는 피츠로이의 남부 파타고니아의 최고봉이다. 상어 이빨처럼 우뚝 솟아있는 이곳은 악명 높은 날씨로 유명하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오를 만큼 매력적인 곳이 아닐 수가 없다.
아저씨의 말대로 유난히 날이 좋았다. 산을 오르는 내내 다른 세계에 와있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요정이 나올 것 같은 울창한 숲속이었다가 동물들이 뛰어다닐 것 같은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겨울이었다가 봄이었다가 여름이었다 계절이 뒤죽박죽 뒤섞이기를 반복했다. 남미의 풍경은 매번 같은 듯 다르다. 그것이 이곳의 매력이기도 하다.
장작 세 시간 반 동안 겉옷을 벗었다 입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중턱에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누구 하나 귀찮은 기색 없이 저녁 준비를 하며 음식을 나눴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 페트병으로 급하게 만든 와인잔. 그리고 따뜻했던 라면 국물. 그곳에 모인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식사했다.
이곳은 문명의 시간을 거스른다. 자연의 시간을 따른다. 이제 겨우 6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해가 지니 주위에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니 급격히 떨어지는 체온에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서둘러 텐트 안으로 몸을 숨겼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자연의 섭리를 말해주는 듯했다. 말로만 듣던 산속의 혹한이었다. 잔뜩 껴입은 외투, 세 겹의 양말, 두 개의 침낭에도 소용없었다. 자는 내내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뒤척이기를 몇 시간. 어느덧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피츠로이에 오르는 이유는 일출을 보기 위해서이다. 걷힌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봉우리의 풍경이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또한 산이 허락해주어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말이다. 피츠로이는 유독 산 주변에 눈과 구름이 가득해 정상을 보기 힘들다. 오죽하면 연기를 뿜는 산이라고 불릴 정도니 그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lucky girl!!'이라고 인사를 건네던 아저씨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직은 어둠으로 가득한 새벽, 끝없이 별 쳐진 별들과 어여쁜 초등 달이 나를 반겼다. 잠시 헤드 랜턴을 끄고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늘의 오선지에 수놓아진 은하수 사이로 별똥별이 떨어졌다. 두 손을 모아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제발 맑은 하늘을 보여주세요.'
모두의 걱정과 예측을 뒤엎을만한 청량한 하늘이 보고 싶었다.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듣던 대로 만만치 않았다. 생각보다 더 험난했다. 더군다나 어제부터 상태가 좋지 않던 몸이 말썽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올랐을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피츠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봉우리가 붉게 물들어 갔다. 꿈인 듯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태양을 마주했다. 물론 인생은 새옹지마는 말이 있듯 전혀 예측 못한 변수들을 다시금 던져줄 테지만 이 순간만큼은 현재의 감정에 충실 하는 것이 이 자연에 대한 예의였다.
해가 중천에 뜬 것을 보고 나서야 하산을 시작했다. 감격의 순간도 잠시, 빡빡했던 일정 탓에 쉴 틈도 없이 이동 준비를 했다. 전날 예약해둔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랜턴 가게로 향했다. 그러다 앞서가던 친구가 당황한 듯 걸음을 멈췄다.
”왜, 무슨일인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게의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게 아닌가. 버스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장비를 반납하고 맡겨둔 여권을 찾아 정류장으로 가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악 올리기도 하듯 핸드폰에선 2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아르헨티나는 시에스타(siesta)라는 문화가 있다. 시에스타는 이른 오후에 낮잠을 자는 시간을 뜻하는데, 남미 한낮의 더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대부분의 가게는 1~4시 사이에 문을 닫고 휴식을 취한다. 더위가 조금 가셨을 때 다시 문을 열고 저녁때까지 영업하곤 한다. 처음 시에스타라는 문화를 접했을 때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몇 번의 불편함을 겪고 나서야 ‘꼭! 기억해둬야지’하고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새 까먹고 말았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임을 증명하는 꼴이 됐다.
"그러게, 내가 장비 반납부터 먼저 하자고 했잖아…."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친구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법. 침착하게 셋의 머리를 모아 대책을 마련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머리가 여럿 모였다고 해서 기발한 묘수가 떠오를 리 없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지 불행 중 다행으로 시에스타와 상관없이 영업하고 있던 근처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곧장 안으로 들어가 상황 설명하고 전화 한 통을 부탁했다. 그러나 사람이 당황하면 가끔 멍청한 짓을 한다. 전화를 부탁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사장님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좌절에 빠져있던 찰나 우리를 유심히 보던 어느 한 손님이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곧이어 그곳에 있던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일처럼 나서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동네 주민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토론 아닌 토론을 했다. 마치 영화에나 나올법한 그림이 그려졌다고나 할까. 때로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뒤에 일정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꼬여갔다. 버스 시간을 변경하려 시도도 해봤지만 그마저도 안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런걸 두고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건가...’ 점점 초조해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또다른 남자 헌 분이 오셔서 사장이 아마도 근처에 있을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돈이라도 아끼자는 마음에 버스 회사에 환불 요청전화를 하려는 찰나, 조금 전 전에 뛰어갔던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는게 아닌가. 그것도 렌탈샵 사장님과 함께…! 그 순간 모두가 자신들의 일인냥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가 버스 출발 시간까지 십분 남짓한 상황이었다. 안도감과 함께 고마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귀중한 휴식 시간에 한 팀의 손님 때문에 쉬던 시간을 멈추고 다시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사장님은 오히려 자신이 설명이 부족했다며 미안하고 사과했다. 기적처럼 여권을 받고 돌아가는 길, 그곳에 있던 모두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리의 인사에 되려 그들이 위로를 건넸다. 짧았지만 길었던 시간 40분. 마음이 전해지고도 충분히 남았던 시간.
이 작은 도시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여행객들이 오간다. 우리는 그 많고 많은 여행객 중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음 한뜻으로 걱정을 해주고 도와준다는 건 어쩌면 그들의 때 묻지 않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의 순수한 친절에 놀랄 때가 많다. 그들의 친절은 늘 예상을 벗어난다.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품을 내어준다. 그럴 때면 나의 부탁에 언제나 진심으로 도와주는 게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늘 웃었고 늘 여유로웠으며 늘 열려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배타적이기만 했던 나를 나무라는 듯했다. 낯선 땅의 낯선 이방인. 아마도 나만 나를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여행이 주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만나는 예상치 못했던 따스함. 그 안에서 나는 끊임없이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리고 그렇게 뜨겁게 타오르고 식기를 반복하며 눈앞에 삶을 기꺼이 만끽하는 법을 배운다.
찬란한 태양아래 품을 내어주던 피츠로이를, 따뜻한 손길로 안아주던 할머니 한 분의 품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저멀리 오는 버스를 향해 미친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두 팔 벌려 힘껏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I'm So lucky girl! Muchas Grac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