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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Aug 16. 2024

도서리뷰 :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_제로 편



당신이 언제가 당신의 내면 안에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
-본문 중에서-



세상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을 읽고, 세상을 관찰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탐구한다. 이 책은 이러한 탐구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깨우고 확장하려는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55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며 이 책이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사고의 확장을 유도하는 점이 인상 깊었다. 저자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이끈다. 어쩌면 이 책은 저자가 수많은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이 모두 정답이라 말할수는 없다. 사실적 기반을 둔 정보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저자의 가치관에 기초해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치 있는 이유는 다루는 주제의 폭넓음과 독자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들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우리의 고정된 세계관을 돌아보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느껴지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지식의 방대함에 대한 경이로움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저자가 전하고자하는 궁극적인 메세지에 대한 깊은 울림이 주는 감동이 더 크다. 책을 읽는 내내 그동안 내 안에 있던 오래된 생각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파괴되고 재창조되기도 했으며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이 찾아가는 과정을 미약하게나마 경험했다.


허무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종종 삶의 의미를 잃고 혼란스러워지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허무주의에 맞서 의미 있는 삶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저자는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이 어렵지만 그만큼 필요한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허무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만큼의 희열을 동반한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세계관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일원론에 가까운가, 이원론에 가까운가?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나의 색안경은 어떠한가?


이러한 질문 끝에 내린 결론은, 현재로서 나는 일원론적 세계관에 조금 더 까운것 같다. 그 이유는 분리된 세계의 모순과 한계가 나를 지치게 했기 때문 일수도 있고, 현실 너머의 것을 추구하고자하는 갈망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일원론적 세계관을 더 깊이이해하고 알고 싶다는 것이다. 일원론적 관점으로 현실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그것이 현실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권태와 무의미함을 느끼고, 그 너머의 것을 갈망하기 마련일테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원론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야 더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이유,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현실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듯이.


여전히 세계를 파괴하고 창조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그것만큼의 희열도 없다.

그래서 과감히 세계관을 파괴하기를 택해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의 색안경을 인식해 본다. 


이러한 질문과 인식을 통해 나의 세계관도 나의 삶과 함께 변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어떠하든 그 여정을 멈추지 않는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세계관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확장될 것이다.


보다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을 위해 위해,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나의 오류와 고집, 고정관념으로 가득차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번 돌아본다. 중심을 잃지 않되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싶다. 나의 울타리와 한계를 인정하고 인식하되 그것에 갇혀있고 싶지 않다. 


잠들어있는 나의 반쪽 세계를 깨운다. 그것은 원래 나의 것이었고 앞으로도 나의 세계다. 

그러기 위해 책을 읽고, 세상을 공부한다. 미지의 세계를 읽는 눈을 넓혀본다.


“당신이 언제가 당신의 내면 안에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본문 중에서”




[책속의 공명 구절] 


22 실제로 고대의 현자들은 자아가 무엇이고 세계가 무엇인지를 깊게 탐구했다. 

22 판단 중지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선입견을 멈추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눈 앞에 드러나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언제나 색안경을 쓰고 바라본다. 실제로 당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그 색안경을 벗은 적이 없다.

24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용기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내가 쥐고있던 세계관을 내려놓을 용기를 말한다. 내가 믿는 진리가 거짓 일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 말이다.

36인간은 누구나 우주의 시작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36 자기 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 과정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유의 출발점이자, 최소 조건의 된다. 장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스스로 를 객관적 대상으로 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40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큰 맥락과 합리적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의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의 세계를 이해했던 사유 방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56 근데 물리학이 다루는 세계는 거시 세계였고, 역자역학이 다루는 세계는 미시 세계였다. 이들은 중간의 모종의 높은 턱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는 서로 다른 물리학의 지배를 받는다.

67 아무래도 세계는 신비한 무언인 듯 하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무한하고 중접되어 있으며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기이한 세계의 애무 일부분만을 단순하게 이해하도록 태어났다.

111 현대에 이르러서도 인류가 ‘신’을 놓지 못하는 철학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바치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세계를 창조한 신이 인간의 기원일 것이라는 상상은 나의 존재론적 하찮음을 해소해준다. 

112 인간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곧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14 기억해야 한다. 텅 빈 우주를 지켜보고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는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173 인간은 누구나 벌거벗은 신체에 던져져서는 던져진 세계 속에서 때로는 순종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175 세계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물질적 풍요에 마음을 뺴앗겼다….21세기의 기술 발전과 함꼐 등장한 대중 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말초적인 욕망을 쏟아내며 우리에게 말한다. 질문을 멈추라. 생각을 멈추라….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떻게 혼란을 멈출 것인가? 고통과 분영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답은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해답은 이미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181 우리가 굳이 낯선 세계관인 ‘베다’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나의 매면 세계 안에 가려진 미지를 향해 여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나의 세계관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저 너머에 따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1 우리는 타인과 통일한 언어를 사용해서 원활한 소통을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상이하고 이해 인해 서로가 이해하는 의미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의 주고나성은 바꿔말하면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내면을 반영하는 표식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191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누군가 신을 말할 때 그 신은 발화자의 내면을 반영한다. 신은 각자의 마음안에 산다. 

206 실재론은 상식적인 세계관으로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있다는 관점이다. 반명 관념론은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있다는 관점이다. 

209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실재론은 결국 세계와 자아의 불리라는 이원론으로 향하고, 관념론은 세계와 자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212 문제가 되는 사람은 하나의 선택만이 옳고 다른 선택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일뿐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213 오늘날 우리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중략)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단 한 번도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을 가져본적이 없는 우리가 고대의 인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218 그렇다고 할 때 오늘날 많은 이가 따르는 거대 규모의 종교나 사상 체계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이라는 것일뿐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231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의지를 상실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중략)

243 인도 사상의 거대 줄기를 살펴본 3장에서 우리가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할 개념은 한가지다. 범아일여. 자신의내면 깊이 침잠함으로써 체험 적으로 얻어야 하는 진리. 하지만 현대 물질문명이 주는 안락함의 익숙하고 먹고살기 빠듯한 우리가 이를 인생에서 체험할 가능성은 요원하다.

244 오늘날 현대인이 고전을 읽어내는 것을 힘으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은 고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단일한 한 주제에 대해 너무나도 낯설어 하기 때문이다. 고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건 많은 지식이 아니라 그 고전이 발 딛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선 이해다.



249 역사가 깨어있는 것이라면 신화는 꿈을 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62 도가 우주의 법칙과 질서라고 한다면, 덕은 그러한 도의 본질이 반영된 인간의 마음이다. 노자는 인간의 근본 심성이 우주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265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이 좋은 텍스트는 해석과 함께 매순간 다시 탄생하는 것이니 말이다.

267 우리는 세계라는 ‘있음’안에서 태어나 ‘있음’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삶의 시간 동안 결고 완벽한 ‘없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진정한 없음인 ‘나의 사라짐’은 결고 나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도를 다루기 쉽지 않다. 도는 존재하는 세상 너머의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포함한다.

273 노자는 높은 덕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의 덕을 내세우지 않고 그 무엇도 억지로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다. 반대로 낮은 덕은 어떻게든 자신의 덕을 돋보이려 애쓰고 억지로 덕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의 모습니다.

275 인,의,예가 사회에서 장려되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 사회에 어짊, 의로움, 예정이 없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284 탈속과 세속, 얼핏 모순되어 보이고 화해할 수 없는 것 같은 이 양극단의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 영혼의 보편적인 무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렇다 저렇다 규정할 수 없는 넓은 범위를 아우르며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살아가고있는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295 대체로 공자의 인은 공손함, 관대함, 신실함, 자애, 지혜로움, 용기, 정직, 효성, 인간적임, 인정많음, 친절함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중략)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상황에 집중한 개념이다.

296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군자와 소인의 개념은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것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디 남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기준이 아니다.



331 싯타르다는 무언가를 이해한 것만 같았다. 극도의 쾌락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처럼, 극도의 고통 역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338 붓다는 지혜롭게 말한다. 너 자신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라. 이 다섯가지 요소가 너를 구성하는 전부다. 이 외에는 없다. 그리고 이 다섯가지 요소 중에서 불변하고 고정된 것은 없다. …(중략)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데서 발생한다. 이러한 무지가 고정된 자아와 불변하는 영혼을 갈망하는 집착을 낳는다.

349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예술,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분열은 필연적으로 방생하고 그때마다 우리를 실망스럽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열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복잡성과 다양성의 증가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게 하고 다양한 지역에 적용될 가능성을 높인다.

383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무아설’에 있다. 자아의 실체를 부정하는 세계관은 지금까지의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개념이다.

385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이 말하는 바에 귀 기울여야하는 것은 그들 중 누군가가 진리를 말했고 다른 누군가가 거짓을 말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에 대한 답을 내가 찾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것은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세계관이 답한다.

386 수많은 세계관의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만이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자신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419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를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학습을 통해 주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질문과 대답을 통해 스스로 정립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420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다른 사람이 진리를 잉태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다만 도울 뿐이라고 생각 했다.

424 그럼에도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모범으로 삼는 것은 그의 삶 때문이다. 그의 삶 전체가 철학자의 삶, 다시 말해 사유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의 철학과 삶을 일치시킨 모범이라는 면에서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기원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433 이원론이 분절된  절반의 세계의 가치만을 인정하고 필연적으로 나머지 절반의 세계에 폭력을 가하게 된다는 비극은 근현대에 이루러서야 비로소 서구 사회가 깨달은 실상이었다.

444모든 대립되는 학문적 개념이나 관점은 각각 나름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실재론과 관념론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대부분 실재론자로 태어나서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다가 실재론자로 죽는다. 다만 삶을 실용과 안락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진실과 깊은 이해의 측면에서 접근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관념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다.

451 [순수이성비판]에서 비판이란 무엇인가를 비난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제시한다는 뜻이다.

455 인식이란 다음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사물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과정 혹은 결과

476 판단 중지는 기존 종교와 사상으로 생긴 우리의 선입견을 멈추고자하는 현상학적 모토다.

469 현상 너머의 세계는 우리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세계지만, 적어도 그곳에는 빛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단한 형태와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량의 물질과 에너지가 요동치는, 거의 비어있는 세계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514 확실한 것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거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예수의 입에서 나온 삶에 대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반면 에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517 역사로서의 예수와 초월로서의 예수는 예수라는 존재의 두 가지 측면이자 상호보완적인 특성이다. 

537에크하르트는 마음에 신이 내재하고 있음을 가르쳤다.

539 시대와 장소를 넘어 궁극적 존재에 닿고자하는 모든 이는 어쩔 수 없이 인간 사유의 유일한 도구인 언어의 한계에 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신의 본질과 합일되기 위해서는 신의 개념도 떨쳐내야 한다.”

541 에크하르트의 사상과 체험은 독특한 무엇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든 지역과 모든 시대에서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체험하게 되는 편적인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541 진정한 자유, 이 말은 세속의 화려함과 분주함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울이 일생 전체가 자본주의적 노동과 소비만으로 채워져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때가되고 우리가 준비되어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심연으로 침잠할 기회를 갖게될 것이다.



547 우리는 왜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만 하는가? 우선 실용적인 이유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고전을 읽어내지 못한기 때문이다. …(중략)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 밖에 모른다는데 있다. 인류의 사유를 출발시킨 위대한 스승들은 일원론을 말해왔는데 우리는 이원론의 세계에서 태어나 그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중략) 다음으로는 당신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세계관이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550 우리가 이원론을 넘어 일원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한 발을 내디뎌 익숙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절반의 세계인 일원론의 세계, 그곳의 주인이 원래 당신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깊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551 무엇을 할것인가 파트의 7가지

553 “당신이 언제가 당신의 내면안에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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