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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Aug 08. 2024

도서리뷰: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_2

진리는 무엇인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편에서는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종교 각각의 파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된다. 평소 궁금했던 단어들과 내용들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서 재정립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책 제목대로 어디 가서 기본적인 대화는 할 수 있는 정도의 얕은 지식이 쌓였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얕은 지식을 넘어 조금은 깊은 지식을 쌓고 싶다.


철학 파트는 조금 익숙해서 그런지 읽으면서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정보들이 정리되는 느낌이었고, 과학파트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생소한 단어들에 머리가 아파왔지만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흥미가 생겼다. 예술과 종교 파트는 가장 수월하게 읽었던 파트였다. 신비 파트는 읽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어 스스로에게 여러 질문들을 던지게 만들었다.


이 5가지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이야 이며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 이것들이 진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최근 들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여전히 어렵고 막연한 질문이다. 어쩌면 ‘진리’에 대한 물음이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한 인간으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진리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 과학, 예술, 종교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분야 같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결국 ‘진리’를 찾고 하자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적 인적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왜 그럴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철학과 과학, 예술과 종교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기존의 가치 또는 진리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역사를 거쳐왔다는 것이다. 그 반복이 지칠 법도 한데 인간은 여전히 서로 대립되는 두 이론과 가치 사이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진리’를 갈망한다. 과연 ‘진리’가 있을까. 어쩌면 ‘진리’는 개개인의 믿음과 의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가장 마지막 파트가 ‘신비’인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나는 무엇을 진리라고 생각하는가?’하고 묻게 된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쉬지 않고 충돌한다. 모든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증명이 가능한 과학주의로 가득한 이 세계에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망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충돌이 얼마나 오래도록,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더 욕심난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내면세계와 같은 것들에 대한 가치가 더 올라가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갖게 한다. ‘그 세계가 있을까?’, ‘그 세계는 무엇인가?’ ,‘그 세계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들 말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는 이론을 만들어내며 치열한 토론을 벌인 것도 결국 우리가 사실 혹은 전부라 믿었던 세계의 틀림을 증명하거나 그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꼭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모두 크고 작은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각자 나름대로의 치열한 토론을 벌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내적 싸움은 물론이요, '내가 맞네, 네가 맞네' 하면서 말이다. 결국 인간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시간 속에서 ‘내가 정답이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걸까? 얼마나 속고 있던 걸까? 아니, 정확히는 속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걸까? 책을 읽으니 더 여실히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과학주의가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이라는 말이 참으로 와닿으면서도 웃기게 느껴졌다. '역시나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하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어쩌면 이것은 비단 과학주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지점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가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물음을 던져본다. 모든 철학과 과학이, 예술과 종교가 산산이 부서지고 해체되며 다시 재 창조되었듯이 어쩌면 앞으로 나의 세계도 수없이 그러한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다행히도 책을 읽고 나니 그런 과정이 두렵고 무섭다기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어떤 재창조와 변화들이 삶에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삶은 흐르고 있고 나의 의식은 깨어있으며,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를 내가 의식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삶의 신비를 누릴 일만 남았다. 어쩌면 이것이 진리가 아닐까. 지금 내가 나를 기준점으로 살아 숨이며 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내면세계, 나의 우주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


앞으로의 생은 맹목적이고 단편적인 삶보단 이왕이면 삶이 주는 신비를 진정으로 깨달아 그 안에서 나만의 다채로운 빛 내뿜으며 여러 작품을 만들면서 살고 싶다. 저자의 말마따라 우리는 각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주인공일 테니. 그러기 위해서 산산이 부서지고 해체되자. 그 속에 숨겨진 나의 본질, 진실, 진리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책 속의 공명구절>


8  대화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다 바로 공통분모다.

9 지적 대화를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이 지식이란 무엇인가? 답부터 말하면 그것은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다.

28 모든 것이 진리라는 생각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49 인간은 왜인지 몰라도 잘 모르는 대상이 나타났을 때 이를 둘로 쪼개서 이해하면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50 이분법은 중세와 근대의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강력한 틀이었다. 문제는 이분법으로 구분된 두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를 억압하고 차별한다는 데에 있다.

86 아무래도 세계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현살’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 말이다. 철학이라는 분야가 어렵고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부 내용만 조금씩 바뀔 분,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94 세계를 증명하는 이리 참으로 쓸데없어 보일지 몰라도 한번 의심해 보기 시작하면 정말 의심스러운 세계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해진다.

98 경험론이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이것이 실제로 별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근대의 경험론이 승리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고도로 발전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확인되고 증명되는 것만을 믿는 경험론자들이 되었다.

112 본다는 것은 외부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머릿속에서 해석된 그 무언인가를 보는 것이다.

113 우리는 서로 다른 각자의 현상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주관적인 존재다. 박쥐와 아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고 있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 역시 너무나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자폐아이다.

121 니체는 우리에게 제안한다 순종적인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하는 주인이 될 것을 말이다.

127 의식의 문제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신비하고 심오한 문에라고 할 수 있다.

128 존재에 대한 물음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128 현존재는 현재 존재하고 있어서 존재의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존재자이다.

133 언어는 정의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하다. 역사상 모든 학문 종교, 철학, 사상이 존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 안정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136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가지 발 식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하는 것이다.

137 인간은 의지나 돼지처럼 단일한 본질을 갖지 않는다…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규정되지 않고 자유로는 존재인 인간을 억압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입단들이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자신의 본질이라 믿는다.

138 나에게 뒤집어 씌워진 본질을 하나씩 벗어내고 어떠한 규정과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면 나에게는 단지 세 가지만 남게 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실존하는 존재다.

191 과학주의는 모든 문제가 과학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흥미로운 건 실제로 과학자 집단이 과학에 대해 갖는 신뢰보다 대중이 과학에 갖는 신뢰가 더 크다는 점이다. 과학의 실제 내용에 대해서는 무고나심 하면서 과학이 진리라고 믿는 마음가짐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매우 종교적이다.

192 실제로 패러다임이 의미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단지 예전과는 달라진 사고방식일 뿐이다.

196 이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과학적이지 않고 정치적인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과학의 역사는 점진적인 진보가 아니라 혁명적인 단정의 역사였던 것이다.

198 과학은 전반적으로 절대주의적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것은 과학 탐구가 자체가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203 하지만 공적인 측면에서 지위와는 무관하게 사적 측면에서의 예술작품은 구체적인 개인의 내면에 심오한 울림을 선사함으로써 수많은 이를 진리 앞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238 예술사에서는 이성과 감성,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258 현대 미술을 단순화해서 한마디로 정리하면 ‘새로운에 대한 강박’ 정도가 될 것이다.

269 단정적으로 정리한다면 현대 예술은 ‘미의 추구’라기보다는 ;새로운의 추구’다.

277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결국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어떤 학문보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제시해 주었다.

300 어떤 명칭이 맞느냐를 두고 다투는 건 신의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328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태도와 다른 종교를 애써 보지 않으려는 태고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신념과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가치들과 상호 비교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다른 가치들은 무지의 베일로 덮어두고 자신의 신념의 깊이만 반복해서 고려는 사람의 삶은 맹목적이고 단편적이다.

337 예술의 아름다움이나 신앙의 경건함이나 삶에의 미나 죽음의 신비는 다른 누군가와 토론하거나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353 니체가 이렇게 끔찍한 사후관을 우리에게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니체가 우리를 그저 허무함에 빠뜨리기 위해서라 아니라 영원 회귀  개념이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들기 위해서다. 영원회귀는 두 가지 시간의 길이를 전도시키다. 그것은 ‘인생’과 ‘순간’이다.

354 니체는 영원회귀 개념을 통해 정말 중요한 것은 먼 미래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임을 밝힌다.

354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영원히 반복될 이 순간을 위해 나는 내 삶을 창조해야만 한다.

356 죽음이라는 예정된 사건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행위를 이해하게 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항상 삶의 의미와 엮여있다.

357 죽음 이후의 여전은 신비의 영역이지만 이보다 더 궁극적이고 경이로운 신비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왜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 속에 있을까?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357 삶의 신비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발견되는 인생과 공간 안에서 발견되는 의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72 만약 그러하다면 너무나도 선명하게 펼쳐져 있는 감각적인 현상 세계가 사실은 내 의식에 드러난 내면세계라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내가 나의 외부로 나가본 적이 없음을, 사랑하는 사람들, 짜증 나는 김 부장, 카드 고지서, 핸드폰, 사회와 국가는 모두 내 마음속에 있음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산다.

373 그래서 살아있음은 신비하다. 살아있다는 그 개인이 온전히 하나의 내적 세계 하나의 소 우주를 소유하고 그 안에 거주함을 의미한다.

376 삶에서 진정으로 신비하고 심오한 깨달음이 주는 진실은 내가 세계의 구심점으로 세계를 구성해 내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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