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은 시간이 참 야속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벌써 2025년이 3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울적해진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덕분에 어릴 적 어른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간다’는 그 말을 아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혹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날들이 있다.
얼마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카드캡터 체리니, 세일러문이니, 명탐정 코난이니 하며 어린 시절 즐겨보던 만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문득, 어릴 적 만화 ‘둘리’를 보며 깔깔대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둘리보다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너도 어른이 된 거란다”라는 말이 떠오르며, 나도 어느새 어른이 된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른’이라는 단어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좋은 어른’인지, ‘어른다운 어른’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렇듯 책 역시, 어떤 책은 인생의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울림을 주곤 한다. 내게 그런 책 중 첫 번째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두 번째다.
몇 년 전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벅찼고, 두근거렸다.
두 번째로 책을 접했을 때는 공감했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읽은 지금은… 이상하게 슬펐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감정의 곡선을 겪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감정의 변화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예전에 나는 나 자신이 산티아고라고 믿었다. 지금은 산티아고라고 생각했던 시절을 지나, 그가 만나는 행인들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책을 읽으면서 울컥했던 이유는, 모험을 떠나는 산티아고의 마음이, 여행자의 설렘이, 이제는 내 안에서 사라진 듯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세상을 불행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이미 한 번의 ‘연금술’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연금술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때마다 우리는 또다시 자신을 녹이고, 다시 빛을 만들어내야 하니까. 그렇다면 지금 나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일까, 아니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나태함일까. 내 안의 ‘보물’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외면한 채 살아온 건 아닐까. 혹은 지금의 이 여정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또다시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과정일까? 과연 잃어버린 자아의 신화를 찾을 수 있을까? 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용기, 사랑… 내 일상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이제야 조금 알것도 같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미 진짜를 찾아가고 있다는 의미일까.
최근 들어 자주 ‘여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여행’은 나에게 꽤나 의미 있고 특별한 단어다. 한때 나는 여행을 추억하는 일이 괴로웠다. 그건 아마도 현재를 불행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찬란했던 과거가 더는 내 것이 아닌 듯 느껴지는 날들. 과거를 갉아먹기만 했던 날들에 그랬다. 그리고 점점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여행의 기억이 다시 기쁨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의 열정과 눈부심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시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하는 작은 동기가 되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가 온전히 만나는 날에 그랬다. 그때 깨달았다. 그 기억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내 기억과 세포에 아주 강력하게 새겨진 진짜 경험이었다는 것을. 여행 중 만나는 불행조차 슬픔보다 행복으로 느꼈던 그 마음이 나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을 살아낸 내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기꺼이 모험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책을 읽다 문득 겹쳐 보인 장면이 있었다. 산티아고가 그릇 가게에서 그릇을 닦아주는 대신 음식과 잠자리를 얻었던 장면이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랜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내가 한인 스태프로 일하며 잘 곳을 부탁하던 모습과 겹쳐보였다. 보잘것없는 대가였지만, 그것은 분명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는 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확실히 모험자였다.
그 한 걸음이 다음 표지판을 불러오듯, 작은 모험의 언제나 다음 선택을 비춘다. 『연금술사』 속 산티아고가 우연과 징표 속에서 길을 얻었듯, 나도 내 삶에서 그런 징표들을 몇 번이나 마주했다. 그래서 생각한다. 누군가의 도움, 뜻밖의 호의, 때 맞춘 한 마디가 결국 우리를 다음 장으로 넘긴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가령, 누군가를 만나 ‘베푸는 일’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 것도 여행 중 만난 누군가의 작은 호의와 말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듯이.
이렇게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순간 순간에도 분명 살렘 왕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온 우주가 나를 돕는다는 사실을 잊는다. 내게 그 우주는 신이자, 성령(혹은 하나님)이자, 어떤 때는 단순한 ‘삶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종종 그 존재를 망각하고, 자아의 신화 따위는 무시한 채 오만과 교만으로 똘똘 뭉친 ‘자아’로만 충만해진 채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
아마도 연금술이란 두려움과 불안을 사랑과 기쁨과 환희와 나눔으로 바꾸는 일이라지만, 내게는 여전히 두려움이 많기 때문일것이다. 여전히 기쁨과 환희를 향한 여정에 서툴고, 그것이 쉽게 몸에 익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는 ‘권태로운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일까. 모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내 안에는 여전히 불안에 떠는 아이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아이는 여전히 외치기도 한다. ‘모험의 길을 가고 싶다’고.
나는 한때 두려움이 없는 아이였다. 물론 두려움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보다 더 큰 열정, 패기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더 큰 힘을 발휘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안전함을 택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안다. 그 아이가 조금씩 다시 살아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아직 움츠러들어 있는 그 아이가, 다시 조금씩 활기를 찾고자 몸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인생의 연금술은 한 번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위로, 혹은 응원이 된다면 좋겠다.
결국 내가 잃었다고 믿었던 것들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깊숙이 덮어두었을 뿐. 그것을 다시 불러내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연금술은 아닐까. “당신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우주가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여전히 믿고 싶다. 아니, 믿어야 한다. 나의 자아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조금 더 나다운 여정으로.
아직은 미정인 ‘어른’이라는 이름 앞에,
언젠가 조금 더 나은 수식어를 붙일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은 ‘완성된 무언가’라기보다는 ‘되어가는 과정’에 가깝다면, 지금의 이런 모습도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멈춰 있는 듯 보여도 분명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P.S. 웃기게도, 작년에 순례길을 알아봤었다. 한 달 코스였다. 아마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새로운 보물 지도 한 켠에, 내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조용히 그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