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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xperiencer Jun 14. 2023

비평하는 것도, 받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영국 교수님과 학생에게 얻은 인사이트

어렸을 때부터 운동, 공부, 악기 연주 등 실패를 많이 겪으며 자라서 나는 실패하거나 남의 비평을 듣는 게 힘들지 않다. 오히려 비평을 들었을 때 고칠 점을 알 수 있어서 좋을 때도 있었다. 물론 감정적으로 평가를 받는 경우는 제외다.

그림 그리고 만들기를 좋아하고 잘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고 방과 후 미술 활동도 중학교 내내 참여했었는데 부모님은 그림보단 공부하기를 원하셔서 예고 진학을 반대하셨다. 중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는 예고 입시 준비를 해서 예고에 진학했는데 나는 예정대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다른 것에는 크게 반항하거나 욕심부리지 않았는데, 예고 간 친구가 정말 부럽고 질투가 나서 한동안 연락도 안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1학년을 마치고 친구가 학년말 전시회를 연다고 초대해서 갔는데 다녀와서 밤새도록 울었던 기억이 있다. 분명 내가 더 잘 그리고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 년 사이에 성장한 친구가 몹시 질투가 났다. 나는 당시 그림을 안 그린 지 2년째 돼가고 있었다. 이대론 안 되겠어! 부모님을 설득해서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미대 입시 준비를 마음먹은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1. 성적을 유지할 것

2. 방학 특강은 수강하지 않을 것

3. 매달 한 달 동안 그린 그림을 집에 가져올 것

조건을 수행하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진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근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방과 후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고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공부 시간은 부족했고 다른 친구들은 주말 특강이다. 방학이면 방학 특강이다. 그림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지라 나중엔 그림 그리는 양에서 차이가 크게 나기 시작하면서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에 우울감에 빠진 적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아빠는 내가 그림 그림을 거실 곳곳에 붙여놓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한 달 동안 걸려서 우리 집에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가받았다. 처음엔 너무 속상했다. 아빠의 평가는 칭찬 한마디 없는 비평에 가까웠다. 사과 색깔이 이상하다든지, 석고상 눈의 위치가 이상하다든지 굉장히 구체적으로 비평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아빠가 미술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냥 본인이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처음 한두 번은 굉장히 속상했는데 아빠가 말한 부분을 고치고 나니 그림이 점점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비평을 듣는 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 뒤론 그림을 붙여놓고 나도 같이 비평했다. 평가가 아니다. 비평하는 거다. 이게 익숙해지면서 질문이 많아졌다.


3학년이 되고 미술학원을 홍대로 옮기면서 매일 주제에 대한 그림 테스트를 진행했다. 4시간 만에 그리고 바닥에 그림을 깔고 선생님의 손짓 하나에 어떤 아이들은 엎드려서 매를 맞고 어떤 아이들을 통과했다. 그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 저 그림은 통과되고 안 됐는지.. 다들 조용히 있을 때, 나만 손을 들고 물어봤다. 왜 저 그림은 통과입니까? 그제야 자세한 피드백을 주셨다.

비평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비평이라도 반감을 품고 들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 감정만 앞서서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비평을 들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잘하거나 칭찬만 들었던 사람은 비평을 듣길 더 어려워한다. ‘칭찬’이라는 평가를 바랄 뿐이지 더 성장하기 위한 비평은 듣기 힘들어한다.


영국에서 첫 수업을 들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Critic Meeting’ 시간이었다. 내가 준비한 과제를 동기들과 교수님이 비평하며 피드백을 주는 수업이었는데, ‘The Six Thinking Hats’ 방법을 활용해서 모든 친구가 참여할 수 있고, 발표자가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The Six Thinking Hats

-White hat(Facts): 데이터 기반의 팩트 이야기 (일반적으로 리서치 내용이나 숫자 중심으로 언급)

-Yellow hat(Positiveness): 장점이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주는 피드백

-Red hat(Emotions): 직관적인 느낌에 대해 주는 피드백

-Black hat(Hazard): 위험성이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주는 피드백

-Green hat(Creativity): 새로운 관점이나 다른 측면에서 주는 피드백

-Blue hat(Managing): 피치 방식이나 전반적인 결론에 대해 정리하는 피드백


수업에 들어가자마자 무작위로 색깔 공을 뽑고 정해진 색깔의 모자를 쓰고 앉아 해당하는 내용에 대해서만 비평한다. 평소 수업에선 불평만 얘기했던 친구가 노란 모자를 뽑으면 심사숙고해서 긍정적인 측면을 얘기하던 게 생각난다. 그 수업을 통해 피드백하는 법을 배웠고, 다양한 비평을 수렴하는 방법을 배웠다. 내 프로젝트를 놓고, 내가 피치 하는 방식부터 리서치 방법론, 내 프로젝트가 끼칠 영향 등 다양하게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비평 듣는 게 괜찮았던 건 아니다. 처음엔 속상해서 방에 들어가 울었다. 지금은 아무에게나 내 아이디어를 말하고 피드백을 받는 게 쉽다. 이게 쉬워지니깐 회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도 발표할 때도 평가를 안 좋게 받을까 두려워하진 않는다. 평가받기 두려워 내 의견을 속으로 삼키지 않는다.


대학교 강의를 들을 때도 현재 회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도 평가받기 두려워 말을 아무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사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교수님이나 팀장님 혼자 떠들 때가 정말 많다. 그러다가 나중에 수업이나 회의가 끝나고 자기 의견을 주변 친구들이나 동료들한테 말하는 모습을 꽤 많이 목격했다. 너무 안타까웠다. 충분히 좋은 아이디어였는데 말하지 않아서 혼자만의 생각으로 끝났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팀장님이 팀원들을 아이디어 회의를 하자며 회의실에 소집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으니깐 돌아가며 하나씩 얘기해 보라며 한 명씩 시계방향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한 명의 아이디어 이야기가 발표처럼 이어지고 이야기가 끝나면 팀장님이 피드백하기가 좋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아이디어 회의’가 아니라 발표가 됐고 발표가 끝나고 평가가 이어지니 의견이 디벨롭이 되지 않고 사장됐다. 대부분의 회의가 그런 식이었다. 다들 회의 시간을 어렵고 힘들어했다. 하다못해 그 아이디어에 대해 비판하더라도 디벨롭할 수 있도록 인사이트가 있거나 방향성이 있어야 하는데 비판만 하다 보니 서바이벌 쇼 같은 평가 자리가 됐다.


반대로 영국에서 공부할 때 아이디어 회의 시간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 교수님의 역할은 사회자였다. 안건을 던져주고 여기저기 아이디어가 나오면 정리를 하면서 디벨롭이 될 수 있게 방향성을 던져주었다. 한 번은 교수님도 자기도 모르게 아이디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한 적이 있는데, 자기 아이디어에 대해 비판받은 학생의 태도에 놀랐다. 교수님과 언성을 높이면서까지 설득하다 교수님이 마음을 안 바꾸니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전 제 생각이 낫다고 생각하고 교수님의 동의를 굳이 얻을 생각은 없으니 제 의견도 존중해 주세요.”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한국 교육 방식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교수님이 내 아이디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주면 다들 “네, 수정하겠습니다. “하며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학생의 용기에 감탄했고,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해 준 교수님께 감동했다. 그때 깨달았다. 비평을 듣는 것도, 비평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구나. 남의 의견에 대해 비평할 때도, 내 의견에 대해 비평을 들을 때도 영국에 학생들과 교수님은 오랜 연습 끝에 익숙해진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비평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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