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끄적끄적

내성적인 내가 외향적으로 보이는 이유

그래서 항상 지치고 힘들었나 보다

by JJ

항상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어울려 즐기다 보면 나의 화려한 입담과 재치 있는 행동들로 인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행복해하는 그들에게 내가 내성적인 사람인데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거짓말 치지 말라고 장난식의 대꾸를 한다. 남들은 모르는 나 스스로의 감정 노동을 하고 있던 걸까? 하기사 모두가 하하 호호하며 주체적으로 분위기를 리드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어느 누가 나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볼 것이란 말인가? 항상 남들 앞에 거리낌 없이 서는 것을 즐겼으며 남의 지시를 받기보다는 내가 주도적으로 일처리 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오해할만하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병적으로 주변인들을 잘 챙겼다. 생일 때가 되면 축하 문자와 소소한 선물을 준비했고, 은연중 들었던 대화 내용을 기억해놓았다가 스케줄에 추가하며 그들의 안부를 세심하게도 챙겼다.


'토익 시험은 잘 봤어?'
'병원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괜찮아?'
'출산 예정일 다가온 것 같은데, 잘 지내고 있지?'


연락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집에만 붙어있는 것을 좋아했던 내가 이토록 먼저 연락하는에 신경 쓰며 살뜰히 남들을 챙기는 삶을 살게 될지는 나 자신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주로 먼저 연락을 하고, 1년 365일 수많은 지인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집안에 붙어있을 틈이 거의 없었다. 나중에는 부모님의 원성을 들을 정도였으니, 외향적으로 보이는 내성적인 하이브리드 인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내성적인 성격의 원인으로 꼽는 것은 어린 시절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잦은 이사를 다녀야 했었던 것이다. 잦은 전학으로 인해 나는 항상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전학 가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내가 직업 군인을 하지 않으려고 그 고집을 피워가며 장기 복무 지원 인터뷰를 과감하게 포기했던 것도 이러한 뒷 배경이 존재한다. 나의 자식이 태어난다면, 내가 느꼈던 동일한 고통을 전가해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크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막상 전학을 가면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친구를 어떻게 새로 사귀어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생각에 골머리를 앓는 상황은 전학이라는 변수에 의해 매번 달갑지 않게 찾아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만 총 3번의 전학을 하였는데, 전학이라는 것은 반복이 되어도 그 기술이나 노하우가 늘기는커녕 그 정신적 고통의 규모만 점점 커져나가는 것임을 몸소 배울 수 있었다. 익숙하게 적응했던 곳을 떠나 낯선 이방인으로서 다시 한번 기존 무리에 녹아들어야 했던 그 심리적 고달픔은 생각보다 그 괴로움이 매우 크다. 그렇게 힘겨운 내면적 사투를 벌이던 중, 초등학교 4학년 이후부터는 드디어 전학을 다니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드디어 전학이라는 악몽과 작별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그때 그 시절, 시내 유명한 고급 중화요리 식당에서 여러 종류의 요리들을 시켜놓고 가족 외식을 한 적이 있다. 맛있는 음식들을 폭풍 흡입하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아들! 단무지랑 양파 좀 더 달라고 말하렴."
".... 저 부끄러워서 못 하겠어요...."
"뭐?! 뭐가 부끄러워!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어서 더 달라고 말해!"
"전 안 먹어도 돼요. 그러니깐 아빠가 시켜주세요."
"어서 안 해?!!!!!!!"


순간 화목했던 외식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버렸고, 눈앞에 진수성찬이 있더라도 더 이상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어서 저기 인터폰을 들고 주문하라고!!!!"


어느새 나의 뺨에는 닭똥 같은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주문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하기가 싫었다. 나는 내면의 거부감과 공포심을 겨우 억누르며 인터폰을 들고 말을 이어갔다.


"안녕.. 하세요.. 흐흐흑흑.. 다.. 단무지랑 양파 좀 더 주세요.. 흑흑흑"
"얘야 무슨 일 있니? 괜찮니?"
"네.. 흑흑 흑흑"
"어느 방이니?"
"네?!"
"무슨 방에서 먹는지 알려줄 수 있니?"
"흑흑흑.. 죄송한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흑흑흑"
"아.. 방 이름을 알려줘야 내가 갖다 줄 수 있단다.."
"흑흑 흑흑....."


아버지의 매서운 눈초리에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음이 된 채로 인터폰 앞에서 흐느끼기만 할 뿐,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다급히 인터폰을 잡아 드시고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아, 아주머니 잠시만요! 단무지랑 양파 좀 더 갖다 주세요!"
"아, 네. 방 이름을 알려주실래요? 아이가 당황했는지 말을 못 하네요.."
"아.. 방 이름이.. 목련 방이네요! 감사합니다.."


다행히 어머니가 해결해주셨지만 정적만 흐르는 차가운 분위기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안 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험상궂은 상황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젓가락이 탁자를 경쾌하게 탕하고 치는 소리와 함께 맹수의 포효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당신이 얘를 이렇게 끼고돌면서 금이야 옥이야 키워대니 얘 새끼가 쪼다처럼 주문 하나도 못 하잖아!!!!"
"아니, 왜 얘를 이렇게 못 살게 굴어요? 기분 좋게 나와서 외식하는 거면 그냥 기분 좋게 먹지.."
"아니! 이놈의 여편네가! 쟤가 저래서 어디서 뭘 해 먹고살겠어!!! 단무지 하나 주문도 못하는 놈이!!!"
"지금은 어리잖아요! 크면 다 알아서 해요! 그만 얘기하고 식사나 드세요! 아니면 그냥 가던가!"


부모님이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는 것뿐이었다. 식욕이 떨어진 나는 음식을 먹기 싫었다. 그런데 음식을 안 먹으면, 또 안 먹는다고 혼날 것 같으니, 앞 접시에 음식을 조금만 덜어놓고 깨작거리고 있었다.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마!!!"


여러모로 눈도장이 찍힌 날이다. 나는 끊이지 않는 질타로 괴로움에 시름할 때, 누나라고 불리는 사람은 "나는 아빠 피, 아빠 골!"이라고 연신 구호를 외쳐가며 아버지에게 온갖 애교와 아양을 부렸다. 나는 하기도 싫고, 잘하지도 못하는 아첨의 끝판왕을 선보이는 듯싶었다. 나에게도 구호를 함께 외치자며 제안하였지만 나는 그 싫은 구호를 외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얄미로운 누나를 뒤로하고 가만히 앉아서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또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아들! 요리 다 먹었으니, 식사 준비해 달라고 그래! 울면 하나, 짜장 하나, 짬뽕 하나, 그리고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전 안 먹고 싶어요.... 그냥 제건 시키지 말고 엄마가 시켜주세요...."
"그래.. 엄마가 시킬...."
"쾅!!!! 장난해?!"


또다시 한번 빙하기가 도래했다. 나보다 4살이나 많던 누나는 본인이 그냥 시키겠다며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노려보며 나에게 인터폰을 들고 주문할 것을 강요했다.


"흑흑 흑흑.... 저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제발!! 싫다고요!! 싫다고!!"
"이놈의 새끼가!! 눈물 안 그쳐?! 안 그쳐?!!!!"
"흑흑흑.... 엉엉어어어어엉!!!!"
"저 놈의 새끼는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래?!!! 에잇!!!!"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아빠! 미워요! 왜 저만 갖고 그러세요! 제가 싫다고 했잖아요!!!! 싫어요!!!! 싫다고요!!!!"
"울음 안 그쳐?! 빨리 그쳐!! 혼날래?!"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감성이 폭발하며 나의 내면에 숨어있던 모든 감정들이 봇물처럼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달래주느라 애를 쓰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행동이 못마땅하신 듯 눈살을 찌푸리고 꾸역꾸역 음식들을 그의 입안으로 우겨넣고 계셨다.


"얘 교육을 이 따위로 시키니깐 얘가 이 따위잖아!! 커서 뭐가 되려고!! 강하게 키워야지!!"
"얘가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 울잖아요!! 우선 얘를 진정시켜야죠!! 그만 좀 해요!!"


그 끔찍했던 외식의 추억으로 나는 두 번 다시 그 중식당은 가기 싫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번 이상은 가족 외식을 하는 가족 문화 때문에 나는 매번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매사 강압적으로 나의 내향성을 외향성으로 바꾸려고 했던 아버지의 방식이 몸서리칠 정도로 싫고 또 싫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를 내성적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부터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들까지, 나는 그저 유쾌하고, 분위기를 잘 띄워주며,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그런 사람으로 인지되고 있다. 이런 내가 대학교 과대표에 언출련 정책국장, 육군 소대장, 지역 관리자로서 직원들을 관리하며 유기적으로 살고 있었다니, 놀랄 ''자가 있다면, 이런 상황에 써야 적합할 것이다. 이제는 단골집들이 넘쳐날 정도로 서글서글 능글능글 맞게 생활하지만 나의 내면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어릴 적 단무지와 양파를 주문하기 주저했던 그 아이의 심리가 이어져 오는 것처럼 그 내성적인 성향은 여전히 나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호주로 이민을 오면서 의무감처럼 이어오던 인간관계를 하나둘씩 정리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고 광범위하게 끊어냈다. 나를 귀찮고 힘들게 하던 이들에게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으며, 연락을 받기도 싫은 사람들 또한 과감히 차단했다. 광범위했던 인간관계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 정서적 안락함이라는 선물이 찾아왔다. 요즘은 스트레스가 뭐였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 정도면 스스로에게 나름 뿌듯한 삶을 영위하는 듯하다.


남들에게 맞춰가며 살아가다 보니, 나에게는 너무나도 박했던 지난날들이 안쓰럽다. 그렇지만 개인보다는 공동의 목표와 이념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 같다. 조직에 융화되어 조직의 일부분으로써 맞춰가며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하는 수밖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연유로 내성적인 내가 내성이라는 나의 본연의 성질을 꽁꽁 숨기며 감금한 채로,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의 외향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발전했나 보다. 어쩌면 나는 모든 인간관계의 돌발 상황을 미연에 철저히 준비하면서 외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했던 내성적인 인간이 아니었을까?


나의 성향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수정되었다.
이제는 나의 요구를 사회가 수긍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오지 않겠지?

그렇다면 나는 사회가 이기적이라고 말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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