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이라는 단어를 상기하게 되면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항상 강하게 든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게으름을 떨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자신에게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죄스러운 기분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인지 능력이 생겼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게으름은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배척 대상이자 경계해야 할 제1호 대상이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게으름이라는 녀석은 나의 삶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의 심리에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러 들어왔다. 바로 게으름이라고 불리는 녀석이 조금씩 그 자리를 확고히 한다고 해야 할까?
'휴식은 부지런함 일까? 아니면 게으름 일까?'
짧은 고민을 끝마친 후 근면 성실한 휴식은 없음을 전제하고 게으름의 방향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어쩌면 해야 할 일들을, 여유를 가지고 편안히 한다는 전제 자체가 좋은 게으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태하다거나 태만하다는 단어들은 글쓴이가 극혐 하는 행동 양식의 단어들이지만 이제는 내 몸을 위해 여유로움도 배워야 할 시기라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였다. 무언가 항상 계획 속에서 부지런하고 바쁘게만 살아가야만 하는 강박감이 내 마음속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지만 그 게으름이라고 명명한 여유로움과 휴식이라는 녀석들은 나의 신체적 결함을 시나브로 고쳐주고 있었다.
40년 가까이 몸을 혹사시켰다 보니, 몸 이곳저곳에 이상 신호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신없이 경쟁하며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다 보니, 연약한 인간의 신체는 나의 과부하를 견뎌주지 못하고 소심한 방식으로 나의 생활양식에 저항을 하고 있었다. 깨질듯한 편두통과 뒷목 통증 그리고 어깨 통증에 허리 통증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에게 신호를 던져주었지만 눈앞의 산재한 일들과 미래의 안락함을 위해 그 신호들은 철저히 무시한 채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 사이 소심한 저항을 하던 나의 몸 구석구석은 그 저항 정도가 점점 대범해졌고, 그 정도가 매우 심해져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는지 노심초사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환경과 자원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심정으로 일에 대한 강박증을 하나둘씩 내려놓았다. 그러는 동안에 성질을 버럭버럭 내던 나의 몸 상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다. 지긋지긋했던 두통이 어느샌가 사라졌으며, 스테로이드 주사를 매번 맞아도 뻐근했던 목 통증과 어깨 통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낡아가는 몸을 새것처럼 교체할 수는 없겠지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게으름 속에 부지런함을 실천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일 새벽 5시가 되면 아내와 함께 약 1시간 동안 동네 산책로를 빠르게 걷는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신조는 오늘 할 일은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속도를 조절했다. 몸에 밴 습관 덕에 초기에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같아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몸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나의 고집대로만 내 몸을 운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내가 나의 몸을 아껴주지 않는다면 누가 나의 몸을 돌봐줄 것이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신없이 쫓기듯 살아왔었는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직장 생활을 해봤던 직장인이라면 이러한 고충은 이심전심으로 전달될 것이다. 혹여라도 나의 몸에 게으름이라는 포상을 선사할 여력이 있다면, 죄의식을 느끼지 말고 그 녀석의 좋은 면을 우리들의 건강을 위해 적절히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사견을 공유하여 드린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 다 잃는다.'라는 금언은 너무도 명확하고 확실하다. 나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내 몸에 유익한 작은 게으름들을 조금씩 끄집어내어 보는 것은 어떠할지 제안하며 글을 줄인다.
인생의 양면성은 좋은 것도 나쁜 것이 될 수 있고, 나쁜 것도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