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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Nov 29. 2022

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의 압박

적을 안 만들 수는 없지 아니한가?

 지금 돌이켜보면 글쓴이의 직장생활은 요란스러운 인간관계 덕에 눈치도 많이 보고,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며 힘겨웠던 나날을 보냈었던 것인 듯싶다. 본연의 성향을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맞춰가며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와 결이 비슷한, 다른 말로는 유사한 성향의 사람들과 사귐을 가짐으로써 이질감을 줄여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인생의 다양성과 복잡성이라는 선물은 우리네들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호락호락 움직여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마저 말이다.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도 될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사회 초년생, 사회 나이 1살의 사회생활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왜 쉽지 않았던 것일까?

어려서였을까?

사회 경험이 부족해서였을까?


 고분고분 상대방의 성향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이 색깔 저 색깔로 변화무쌍한 삶을 연명해야 했지만, 그에 따르는 대가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괴리감을 억누르기 위해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매일 같이 소모하는 것을 반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모되고 방전되기를 반복하다 보니 1년이 10년처럼 느껴졌고, 5년이 50년처럼 느껴졌다.


 입사 초기부터 동료 최고참에게 제대로 찍혀서 일을 잘하면 잘한다고 시기, 질타를 받고, 정직하게 하면 정직하게 한다고 괄시를 받았다. 혹여라도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엄청난 비난을 각오해야만 했다. 최고참의 일사불란한 진두지휘 아래 직장 동료들의 크고 작은 괴롭힘은 끊이지 않았으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에게는 유치한 내 편 네 편 게임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동료들의 짜증 나는 괴롭힘과는 반대로 직속상관 및 차장님, 부장님 그리고 본부장님 등은 나의 업무력에 칭찬일색 이셨고, 나를 항상 유심히 지켜봐 주셨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셨다. 여하튼 직장 동료 조직 생활의 중심에 서기까지는 약 1년여간의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 모두의 인생들이 그러하듯 그 인고의 과정들은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뛰어난 업무력과 특유의 성실성 그리고 인위의 친화력으로 직장 생활 내 갑의 위치를 탈환한 후 이제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겠지라며 내심 기대했지만, 주기적으로 보직이 변경되어 새로 전입한 직속상관들의 상식을 벗어난 업무 지시 등으로 인해 업무적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졌고, 남들과 달리 아첨과 아부도 안 하는 성격이다 보니,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또다시 고난의 길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나의 죄가 있다면 상명하복 하지 않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 죄가 아닐까? 결론적으로는 아니었더라도, 그들의 성과만을 내기 위한 비효율적이고 부적절한 업무 지시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절대 이길 수 없는 상관들과의 업무적 갈등은 나에게 적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다가왔다.


 혹자가 말하는 '100명의 아군보다 1명의 적군이 더욱 위험하다.'라는 공공연한 상식 덕분에 적들을 안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내 인생의 적들은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쉼 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끊임없는 선택의 양 갈래에서 수없이 고민을 해보았지만 항상 선택의 중심지에는 잘 꺼내보지 못했던 나라는 녀석이 큰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외쳐대고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의 처세술을 젊은 시절의 그때보다 조금 더 단호해졌다. 툭 터놓고 말하자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아군이 있었던가? 원래 삶이란 수많은 적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지 아니한가? 적을 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생존하기 위해 의도치 않게 짓밟거나 물리쳐야 하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적이라고 명명한다면 적들은 항상 나의 곁에서 숨 쉬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수많은 생존 경쟁에서 적들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은 모든 생물들의 슬픈 숙명이다. 본인의 존재 자체가 수많은 유형, 무형의 적군들과 접촉하게 만드는 매개체라고 말해야 할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라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적의의 대소를 떠나 직간접적으로 대면했던 수많은 경쟁자들을 처단했거나 우회했기 때문이다. 꼭 적의를 나타내야만 적군은 아니라는 말이다. 때로는 길거리에서 옷깃만 스치는 인연도 나의 적군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가장 의지했던 직장 동료나 친구, 가족과 같은 소중한 존재가 나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들의 삶 속에 적들은 사방에 널리고 널렸다. 사람은 본디 누구나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의중을 숨기고 상대방에게 접근한다. 수가 틀리면 호의적인 관계 또한 언제든지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 우리네들 삶의 본질이다. 평생 아군도, 평생 적군도 없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오락가락하는 것이 우리네들 삶의 단면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그동안 원치 않았던 감정들을 억누르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던 나의 감정은 지칠 대로 지치고 힘겨워했나 보다. 


 적군을 자원해서 만들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본인 기분대로 남의 기분은 생각하지도 않는 몰상식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더 이상 감정을 소모하느라 애를 쓰지 말라고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한 번이라도 틀어진 대인관계는 반드시 그 상흔을 남기고, 그 상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추후 화해를 청한 후 다시금 친하고 괜찮은 척 연기는 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상흔의 흔적과 향기는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합리적이고 정중한 거절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시나브로 적군으로 돌변한다면, 그 상대방이 애초부터 당신의 아군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인기가 많은 사람이더라도 안티가 없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인간의 다양성과 복잡성에서 기인된 당연시되는 결과이다. 적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미 적들은 우리들 주변에 산재해있다. 다만 누가 진정한 적인지 분간하기 힘들 뿐이지, 사방이 맹수인 이 세상에서 적을 안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나의 적을 선별하여 거둘 자는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안 거둘 자는 나의 에너지 소모를 아끼기 위해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할 것이다.


광범위한 대인관계의 유지는
막대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한다.
 
에너지 과소비로 인해 심신이 괴롭다면,
지출을 줄이는 것이 당연한 처사이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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