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는 이유

가끔은 정신줄을 놓고 싶다

by JJ
"자 JJ가 건배사 한번 해봐라!"

"2차 가야죠 2차!"

"3차 노래방? 콜?"


한국의 술 문화는 직장 상사들을 위한 아부와 재롱잔치의 연속이었다. 직장 생활의 연계라는 개념이 강해서 술자리를 잘 못하는 사람은 술자리를 잘하는 사람에게 인사고과상 뒤쳐지기도 했다. 내 속이 뒤집히고 하늘이 2개로 보여도, 상사와 선배들에게 취한 내색을 보이면 안 됐고, 주는 술은 고스란히 나의 위장 속으로 털어 넣어야만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니, 회사에서 매년 무료로 진행하여주는 건강 검진을 통해 간 기능이 확연히 나빠지는 것을 두 눈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퇴근해서 집에 가고 싶은데, 퇴근 전후 직장 상사의 한마디는 항상 나의 가슴을 철렁이 게 했다.


"오늘 한잔 해야지?"

'오늘도 집에 일찍 들어가긴 글렀군.. 젠장..'


서둘러 회식 장소를 예약하고, 그들을 보좌했다. 1차에서 술자리가 끝나는 법은 절대 없다. 그렇게 "오늘 한잔 해야지?"의 메아리는 어제도 울렸고, 오늘도 울렸다. 그리고 내일도 어김없이 울렸을 것이다. 그냥 매일매일이 오늘이었다. 겉으론 환하게 웃으며 함께 즐기는 듯 연기했지만,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냥 오늘 같은 매일이 싫었다. 나의 시간이 없어서, 나의 건강을 해쳐서,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기가 싫어서.


그런데 회식자리를 간신히 피할 수 있는 날이 생기더라도, 굳이 친구들과 급하게 약속을 잡아 또 술을 마셨다. 술은 싫었지만 친구들과 편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그 시간이 나에겐 황폐해진 내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주일은 그렇게 주야장천 술을 마시고 해독하느라 바빴고, 주말은 골프, 등산, 낚시, 축구, 야구, 경조사 등의 쉴틈 없는 이유들로 또다시 원치 않는 술잔을 드느라 아까운 내 청춘을 소비했어야 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보니, 나의 건강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아무런 외부적 요인 없이 갑자기 코피가 초코 분수처럼 쉴 틈 없이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이러다가 제 명에 죽을 수도 없겠다는 판단이 섰고, 당분간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결혼 1년도 안 되었던 시점에 와이프는 이런 나에게 울며불며 돈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으니 하루빨리 회사를 그만두라며 사정을 했다. 결국 여러 가지 사유들로 인해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혔고, 나의 사직은 회사에 제법 큰 충격을 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듯 보였다. 헤드헌팅을 통해 이직 문의가 제법 들어왔었지만, 조건이 전 직장 같지 않았다. 인생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직원에게 투자도 많이 하고, 겉으론 모든 인사 행정이 투명하고 공정해 보였던 전 회사도 이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는데, 다른 회사라고 다를 바가 있을까?'
'차라리 남 밑에서 일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해봐야겠다!'

나는 원래 회사생활을 1년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었다. 부족한 학력을 커버할 목적으로 호주에서 MBA를 취득하고자 하였으나,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서 포기한 채, 안정적인 월급쟁이의 삶에 안주했던 것이다. 회사에서 국내 대학 MBA 취득 과정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술 좋아하는 직장 상사 비위 맞추느라 매일같이 술을 마셨어야만 했던 나의 생활 패턴상 이수는커녕 지원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어차피 MBA를 취득해도 남 밑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먹고살기에도 바쁜데, 몇억이나 되는 큰돈을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투자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 상황을 핑계로 자기 합리화의 방어기제를 가동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MBA의 꿈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치열했던 나의 청춘을 뒤로하고, 퇴사 후 나는 호주 이민을 결심했다. 회사를 그만둘 때부터 주위의 친구들은 다시 생각해보라며 연거푸 만류하였지만, 나에게는 이 길이 확실해 보였다. 비록 불확실성에 뛰어드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나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으로 극복이 가능해 보였다. 혹시나 모르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이민을 실패라도 하게 될까 봐,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실패하면 한국으로 돌아가 배운 기술로 요식업이라도 하면 된다며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또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나의 자존심은 최악의 상황을 허락하기 싫어했다. 그렇게 이민 도전 3년 5개월 만에 최단 시간으로 영주권을 취득하게 됐다. 호주의 영주권 프로세스가 느렸던 점을 감안했을 때, 2년 3개월 만에 이미 영주권 신청은 완료된 상태였다. 그때는 그저 기술이 있어서 독립 기술이민을 신청할 수 있었던 기술자들의 능력이 부러웠다. 평범하게 이도 저도 아니게 살아왔던 나의 삶은 이민에 전혀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호주라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를 고생시켜가며 함께 이민 1세대가 되기 위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지금은 내가 원래 정착을 계획했던 호주 브리즈번에 새 터를 잡고, 이따금씩 아내와 소주를 한 잔씩을 기울이곤 한다. 그렇게 우리만의 길을 개척하다가 힘이 들 때곤, 항상 길 중간중간 위치한 술 주유소(酒有所)를 방문한다. 술잔을 기울이며 매사 나의 두뇌를 통제하느라 지쳤을 이성을 잠시 쉬게 해 주고, 꼭꼭 숨겨놓아 외로웠을 감성을 좀 더 이끌어낸다. 앞으로도 이뤄나가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걱정이 먼저 앞서지만, 해내야 할 일들이 아직 있다는 점에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인생의 쓴 교훈을 목젖 뒤로 넘겨 나의 혈액 속에 흡수시킨다.


'나는 왜 그렇게도 싫어하던 술을 계속 마시려고 하는 걸까?'
'술이 싫어서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뒀으면서, 먼 타국인 호주까지 와서 표리 부동하게 다시 술이 좋아진 것일까?'


골똘히 생각해 보니,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알싸하면서도 씁쓸한 맛을 내가 좋아할리는 만무하다. 단지 그 알딸딸한 기분을 원하는 것 같다. 흐리멍덩해지는 그 기분. 그냥 세상사 고민거리 그만 생각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틈이 필요한 듯하다. 내 머리가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쉬고 싶다고 나에게 쉬는 시간을 요구하는 것처럼.




건강을 위해 금주하는 생활을 실천해야 하지만, 아내와 나는 이따금씩 소주 2병을 맛있는 안주와 함께 마시곤 한다. 처음에는 한국에서의 외식 습관 때문이었나 보다고 치부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정신줄을 놓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건강 상 이유로 술을 끊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술을 이렇게 찾아 헤매고 있나 보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항상 3가지 사항을 되뇐다.


술은 일급 발암 물질이다.

술은 내 몸에 염증을 유발한다.

술은 뇌 건강에 치명적이다.


술을 안 마시기 위해 되뇌지만, 가끔은 몸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정신적 고통을 위로해 주고자 술을 들이켠다. 가끔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나에겐 아무 생각도 안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건강이 염려스러워서 한 달에 한 번씩만 마시기로 와이프와 약속했지만, 이번 달에만 벌써 3번째 술잔을 들지 말지를 고민 중이다. 무언가에 의존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시름을 달래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발명된 것이 술 본연의 목적 아니었던가?


나이가 들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인생의 참맛을 알아가듯, 술의 참 기능을 알아가는 것 같다.

많은 단점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술을 찾는 나의 무지몽매.
큰일이다. 정서적 알코올 중독인 건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