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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Sep 08. 2022

Ep 31: 자대 배치

항상 구관이 명관이지 아니한가?

 무사히 OBC교육을 수료하고, 또다시 머나먼 여정에 내 몸을 실었다. 꽤 오랜 시간을 이동하다 보니, 삭신이 쑤시고 온몸이 뻐근하였지만, '처음'이라는 녀석의 긴장감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육체적 피로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배치받은 부대에 도착하였다. 부대 연병장에는 모래 바람이 휘날리고 있었고, 당시 나의 느낌을 반영해서였을까? 왠지 모르게 삭막하고 스산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장님(중령)께 전입 신고를 하고 난 후, 보좌관님(대위)은 주임 원사께 부대 소개를 부탁하신 후 황급히 정보 작전실로 돌아가 업무를 계속하셨다.


 주임 원사께서는 간략히 부대 내 시설물들을 소개해주시며, 부사관들과의 만남을 직접 주선해 주셨다. 인사 행정관(상사)을 방문하여 커피를 한 잔 하였고, 장비 보급관(중사)을 만나 또 다른 커피를 마셨다. 그 이후에는 수송관(상사)까지 만나서 인사를 한 후 또다시 믹스 커피를 마셨다. 끝없이 나오는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직책과 이름을 암기하기 위해 애썼다. 평소 커피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첫인사를 하며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하에 그 싫은 커피를 7잔 이상 마셨다. 그러다 보니 속이 메슥거리고, 뒤집힐 지경까지 이르렀다.


'커피로 식 고문하는 건가? 이 정도쯤이야....'


 다행스럽게도 수송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커피는 마시지 않아도 됐다. 간략하게 서로 간의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전임 소대장님(중위)의 인수인계 시간이 이어졌다. 부대 이곳저곳을 누비벼 정신없이 설명해 주시는 덕에 들은 것의 50% 이상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시곤 한 마디를 보태셨다.


"하다 보면 다 알아서 하게 돼! 너무 조급해하지 마!"


 완벽한 인수인계를 기대했던 나의 입장에서는 허술하고, 쓸모없기 짝이 없는 일주일간의 인수인계 기간이었다. 불안해하는 나와는 다르게 선임 소대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전역일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의 아무런 정보도 인계받지 못한 채 선임 소대장은 행복한 모습으로 축하를 받으며 떠나갔다. 그리고 다이아 하나짜리 소위 소대장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소대원들은 그리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임 소대장은 제일 고참 소대장이어서 힘든 작업이나 훈련들을 요리조리 피해 갈 수 있는 역량이 있었지만, 나는 막내 소대장이다 보니 막내 소대장의 소대원들은 직감적으로 앞날의 고생길이 훤히 열렸음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전임 소대장님을 인간적으로는 좋아했지만, 그가 남기고 간 지저분한 창고와 일치하지 않는 재고, 그리고 소대원들의 안이한 정신 상태는 나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초장부터 큰 마찰을 피하기 위해 상황을 주시하며 업무에 먼저 익숙해지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렇게 상황을 주시하며, 소대장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묘한 부대 분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압도적으로 많은 부사관의 숫자에 의한 것인지,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논두렁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는 것인지, 장교와 부사관 사이에 알지 못할 알력 행사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인사 행정관인 그 상사는 자신의 인사권과 인맥들을 무기로 삼아 주임 원사도 무시하며 찍어 누르고, 다른 부사관들과 병사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무차별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대장님은 그의 행태를 인지하시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이 그냥 잠자코 두고 보시는 듯했다. 자신이 마치 이 부대의 실세라고 온몸으로 알리는 듯한 그의 처신에 나는 저절로 미간이 찌그러졌다.


'이건 정치질이 도가 지나치잖아? 또라이의 법칙인가? 인사 행정관은 내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골탕을 먹여줘야겠군.'
'교육관, 장비관, 보급관, 정찰 분대장들을 진두지휘하면서 비협조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구만!'
'주요 보직을 부사관들이 선점하고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고, 알량한 직위와 행정관 입김을 믿고, 전투적으로 편 가르기를 해대는 꼴이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의 나였지만, 실세에 대항하기에는 나의 역량과 지식이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에 그냥 지켜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돌파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행정 병사인 작전 계원 한 명이 죽을 상을 하며 행정실에 앉아 있는 것이 포착됐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걱정이 되어 괜찮냐고 말을 걸어보니 대답하는 것이 가관이다.


"소대장님, 보좌관님이 칼라 프린트하라고 하셨는데...."
"음? 그래. 뭐가 어렵다고. 어디서 하면 되는데?"
"그게 칼라 프린터가 인사과에만 있어서 행정관께 보고하고 인쇄해야 합니다."
"보고하고 하면 되잖아?"
"행정관께 보좌관님이 인쇄해오랬다고, 말씀드렸는데 보좌관님 더러 직접 오시랍니다."
"그럼 보좌관님께 말씀드리면 되잖아?"
"보좌관님께 말씀드렸는데, 화내시면서 제가 알아서 인쇄해 오랍니다."
"참.. 별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를 받네? 내가 해줄게 나한테 줘봐!"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무슨 감사하고 어려울 일이라고, 불필요한 텃세를 부리고 난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결국엔 그 칼라 잉크도 부대 운영비로 구입한 것일 거면서, 참 유치하고 치사하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똑똑똑"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소대장님,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별일은 아닙니다. 작전 계원이 칼라 프린트를 못 한다고 행정실에서 울상을 짓고 있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안부차 방문드렸습니다."
"악! 그 얘기하려면 보좌관님 직접 오라고 하라니까요!!!!"
"네?"
"그 얘기하려면 나가 보세요!!!! 아, 바빠 죽겠는데 귀찮게 왜들 저러고 난리야!!!!"


 인사 행정관(상사)의 불호령에 그의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해져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인사과 행정 계원은 불안함에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좌불안석인 상황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지만, 화를 가라앉히며 행정관께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저더러 귀찮다고 하신 겁니까?"
"아니, 소대장님, 지금 상황이 짜증 나잖아요!! 상황이!!"
"칼라 프린터가 인사과 한 곳에 있어서 온 것이 잘못입니까? 그리고 부대 비품비로 구매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부대 비품비인지, 제 사비로 샀는지, 뭘 아신다고 그렇게 말하시나요?!!"
"그럼 사비로 구매하신 겁니까?"
"글쎄요, 제가 그걸 보고할 의무는 없죠.."
"그럼 돈 드릴 테니, 프린트하고 가겠습니다!"
"아, 진짜 신임 소대장님 꽉 막히셨네, 그렇게 군 생활하면 힘들어요!! 좀 융통성 있게 하세요!! 전임 소대장은 융통성 있게 믹스커피도 사 오고 그러더구먼 왜 이리 생리를 모르실까?"
"커피믹스 사 옵니까?"
"아니, 누가 사 오랍니까? 알아서! 사 왔다고 하더라!라고 말하는 거잖아요!"
"아무튼 저는 프린트하고 가야겠습니다!"
"아악!!!! 바쁘다고요!!! 안된다고요!!!! 업무 방해하지 말고 빨리 나가세요!! 일이 너무 없으셔서 여유가 넘치시나?! 왜 여기 와서 아까운 시간 낭비를 하고 그럽니까? 국가의 녹을 받는 분이 그러면 안 되죠!"
"프린트하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럽니까? 일 방해드릴 것도 없습니다. 행정 계원! 인쇄해!"
"행정관님이........"
"아!! 진짜 성격 이상하시네!!!! 야!! 소대장님 빨리 나가시라 그래라!! 악!! 진짜!!"
"......................."
"와서 하려면 보좌관님이 직접 오라고 하세요!! 왜 그분은 본인 일을 자꾸 부하 직원들한테 미루고 그래!! 이제 말 안 할 거니깐 빨리 나가세요!! 빨리!! 말 걸지 마시고!!"
"그럼, 고생하십시오!"


 참 유치하고 치졸한 공격이었다. 보좌관님은 그런 행정관이 겁나서 본인은 가지도 못하고, 애꿎은 병사들만 중간에서 힘들게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어느 정도 상황은 예측했지만, 예상보다 더욱 안 좋은 상황이었고, 나의 대패였다. 분이 안 풀려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며 행정실로 돌아왔다. 작전 계원은 나의 표정을 보고는 죄송하다는 듯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한테 화난 거 아니니깐, 눈치 보지 마! 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서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괜히 저 때문에 소대장님이.. 죄송합니다!"
"네가 왜 사과를 해!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나저나 인쇄는 못했다."
"........."
"내가 보좌관님께 말씀드려 볼게. 잠시 기다려!"


 혹여라도 작전 계원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싶어 나는 작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들어가도 좋습니까?"
"누구야?"
"소대장입니다!"
"들어와!"
"충성!"
"어.. 뭔 일인데?"
"작전 계원에게 지신하신 칼라 인쇄, 제가 해드리려고 인사과에 다녀왔는데, 보좌관님이 직접 와서 하라고 합니다!"
"아이~씨~~~ 왜 그러냐? 엉? 야 소대장, 도대체 왜 행정관은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뭔 일이 있었는데? 행정관이 아무 말도 안 해?"
"그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드리고 나니, 보좌관님(대위)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총대를 메고 앞장서서 권력 싸움의 전방에 나선 것을 내심 기뻐하는 듯 보였다. 한편으로 박쥐처럼 간사하게 상황 파악을 하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보좌관님이 얄미로웠지만, 올바르지 못한 것을 그냥 보고는 못 지나가는 나의 성미 덕에 부사관과 장교 사이의 불화와 악감정의 골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져만 갔다.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 쉽지 않을까? 주변 동기들에게 연락해보니, 부사관과의 관계가 이토록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아무튼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겠구나..'


 푸념 섞인 한 숨을 내뱉으며, 그렇게 나의 군 생활은 역경과 고난이 가득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글쓴이의 아버지는 육군 헌병대 준사관이셨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집을 그대로 뛰쳐나와 병사로 군 입대를 하셨다가 부사관을 지원하셨고, 그중에서도 헌병 병과에 지원해서 하사, 중사, 상사를 거쳐 준사관까지 진급하셨다. 모진 환경 속에서 30년이 넘도록 근속하셨으니 그 끈기와 인내력은 존경할만하다. 아버지는 부사관 생활의 애로 사항과 장교에 대한 자격지심도 깊으셨는데, 이와 관련 대화는 깊이 안 나눠봤지만, 누구보다 부사관 생활의 자격지심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던 나였기에, 초임 장교로 배치를 받게 되면, 존중과 배려 그리고 화합적인 분위기로 부대 식구들을 대하려는 각오가 이미 오래전부터 돼있었다. 하지만 전입 초기, 나의 그런 각오는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듯 자연스럽게 산산조각 났다.


 부대 내 부사관들은 그들이 맡은 보직을 무기로 삼아, 자기 자신을 추켜세우고 장교들을 폄하하고 깎아내리기 바빴다. 암적인 세력을 조장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군내 정치 전쟁 모드로 돌입하게 되었다. 간편하고 단순하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는 삶을 추구하지만, 인생에는 예외 없이 언제나 항상 또라이 같은 녀석들이 꼭 끼어들기 마련이다. 편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군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참 다이내믹하고 편안히 가는 법이 없다. 이 놈의 인생.


고통은 평범한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게 해 주는,
감성의 도구!

 삶의 고통이 찾아왔다면,
반갑게 맞이해 주자!

"안녕? 오랜만이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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