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 왔다.
그것도 아주 씨게.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지는 꽤나 되었지만
그 단어가 나에게 적용될 날이 올 거라곤 사실 상상도 못 했다.
작년 쯔음부터 채용 시장이 꽤나 차가워지고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성과를 못 내고 주춤해진지도 몇 년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직종 대비, 다른 나라 대비
괜찮은 연봉에, 좋은 동료들에, 퇴사하지 않는 이상 보장된 재택근무에, 무제한 유급휴가에
나쁘지 않은 직장이라 생각해 왔기에 몇 달 전 이직을 한번 해볼까 하면서도
이미 직장이 있기 때문에 간절하지 않았고 더더욱 깐깐하게 이직자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채용 시장은 더더욱 차가워지기만 하고, 나는 눈을 낮출 생각이 없었고,
우리 회사보다 더 크고 튼튼한 회사들 조차 여러 핑계를 대며 구조조정을 하면서
나보다 더 경력 많고 능력 있는 인재들 조차 눈을 낮춰가며 더 간절하게 일자리를 구하는 상황에
내가 옮길만한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았다 나는 분명.
대학 졸업 후 지금의 회사가 유일하게 1년 넘게 다녔던 회사이고
4년 가까이 다니며 안면을 트고 알고 지낸 동료들은 위아래, 다른 팀 다양하게 넓어지면서
팀을 옮길 기회도 이제는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찾으면 더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직을 생각할 때부터 같은 직종에서 다른 직종으로 옮긴 같은 회사 사람들과 커피챗도 해보면서 같은 회사에 있으면서 다른 직종으로 바꾸는 게 어쩌면 가장 쉬운 길이지 않을까 하던 차에
커피챗을 했던 한분이 마침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떠난 그분의 자리가 딱 내가 원하던 롤인 데다가 그분의 매니저가 마침내 전 매니저라 바로 연락을 하였다.
나간 사람의 자리를 정확히 채우진 않겠지만 다른 옆 팀에서 그분 롤 + 다른 일들을 할 사람들 채용하게 될 거라고 소개를 받고, 그 팀의 임원을 소개받아 바로 슬랙 메시지를 보내며 팀을 옮길 기회를 엿보았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며 지금 자리에서 지쳐갔지만 빠른 시일 내에 자리가 생길 거 같고 공식적으로 올라온 포지션도 아니라 먼저 그 자리에 관심이 있다고 내비친 상태에서 희망이 분명 보이면서 나도 점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지지난주 수요일 결정권자 중에 한 사람인 분과 미팅을 위해 다른 팀원들이 멀리서 오지 않는 이상 절대 가지 않던 오피스에도 나가면서 이번에야 말로 좀 더 확실하게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졌는데 되려 물거품이 될꺼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 내가 노리던 그 새로운 자리는 원래 내 직책보다 한 단계 위거나 같은 레벨이었는데 최고 재무 관리자까지 이 자리를 채우는 데에 연관이 생기면서 어느새 이 자리는 임원급이 채워야 할 자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내가 그날 만난 그 임원은 자기가 완전 결정권자가 아니니 한번 다른 분 (결정권이 더 있는 분)이랑도 만나서 얘기해보라며 자기도 여기저기 물어보고,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힘이 쫙 빠지며 아무래도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전문 심리 상담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전문 심리 상담은 회사 복지에도 포함이 되어있었는데 어떻게 쓸지도 모르겠고 굳이 필요가 없어서 나와는 상관없는 혜택이라는 생각에 한 번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복지 중에 하나였다.
집으로 돌아와 회사 이메일을 뒤지고 뒤져 전화를 하고 무엇을 도와줄까 하는 말에 무작정 도움이 필요하다 말했다. 사실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우선 이 번호를 찾았다고.. 그러면서 주저리주저리 내 상황을 말하는데 말을 하다 보니 서러워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래도 어찌어찌 설명을 하고 상담사는 정말 힘들었겠다, 너는 분명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상담사가 아니고 내가 네가 받을 수 있는 상담사 리스트를 뽑아 내일 안으로 전해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이메일로 받은 전문 상담사 연락처를 받았는데, 아직도 나는 그다음 주에 더 만날 임원들도 있어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상태라 상담사에게는 급하지 않으니 다음 주 월요일에 첫 상담 예약을 잡았다.
월요일 아침. 그날 낮에 만나기로 했던 메일 결정권자 중 하나였던 임원은 내 미팅을 거절했다. 내 매니저의 매니저였지만 한 번도 따로 얘기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전 주에 이미 슬랙을 통해 내 소개와 내가 왜 미팅을 잡았는지 간략하게 설명했었는데, 그걸 보고 그 임원은 내가 원하는 그 자리는 좀 더 높은 레벨의 사람이 필요로 하고 자기가 얘기해 보라고 추천할만한 사람들은 이미 내가 다 얘기를 해본 거 같아 오늘 미팅에선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 거 같다며 거절한 것이다.
그 메시지를 본 순간 지난 몇 달간 터널 끝의 한줄기 빛이라고 믿어왔던 같은 회사 내 다른 팀 이직이라는 희망이 사라지며 터널 끝의 빛도 완전히 꺼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그날의 첫 미팅은 굳이 내가 말을 안 해도 되고 보기만 하는 미팅이라 지나갔는데, 미팅이 끝난 순간 속이 매스껍고 손이 떨리며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서 매니저에게 오늘은 쉬겠다고 하고 컴퓨터를 닫아 버렸다.
그날 오후 상담사와 첫 상담이 있어서 하염없이 그 시간만을 기다렸다.
밥을 챙겨 먹고, 소파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뜬금없이 안경이 부서지고, 이런 상담은 처음인데 한 시간 동안 주저리 주저리 하다가 내가 해야 될 말을 다 못 하면 어쩌나 겁이 나 개인 컴퓨터를 꺼내 워드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정리를 하다 또 혼자 한참을 울었다.
그냥 너무 다 서러웠고 슬펐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라 큰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 성격이었고, 나는 항상 모든 걸 혼자 잘해온 편이라 가족이던 주위사람이던 넌 항상 잘해라는 소리만 들어와 봤지 지금 느끼는 주체할 수 없이 감당되지 않는 답답함과 모든 감정들이 낯설고 그냥 다 싫었다.
우리 주에는 일시적인 메디컬 리브 제도가 있는데 보통은 본인 수술이나 다른 직계 가족이 수술을 받으면 가족을 돌봐야 할 때 쓰는 유급 휴직 제도가 있다. 요 며칠 점점 힘들어지는 업무와 정신적인 압박감에 이것도 과연 해당될까 싶어 챗지피티를 통해 물어봤을 때 정도가 심하면 번아웃도 이 휴직 제도를 쓸 수 있다고 했지만 처음 보는 상담사와의 첫 상담 안에 소견서를 받을 수 있을 확률은 낮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얘기를 쏟아붓고 휴지한통을 막 클리어 했을 때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상담사는 내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많이 힘들었겠다, 미안하지만 너의 회사는 네가 주는 만큼 너에게 돌려주지 않고 너에겐 휴식이 필요해 보인다. 원한다면 내가 소견서를 써주고 휴직시간을 가지며 너를 먼저 돌보는 시간을 가지는 걸 추천한다라며 먼저 말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그 휴직 기간 동안 이직 준비를 해도 되고, 그냥 푹 쉬며 돌아갈 준비를 해도 되고 가능성은 무한하다며 나를 위로해 줬다.
어떻게 말을 꺼내나 고민하다가 내 얘기를 하다가 주저리주저리 방향 없이 얘기를 쏟아붓던 내게 그 상담사의 해결책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그래서 나는 3개월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 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휴식 후 힘을 내 다시 내 자리에서 일을 이어 갈지, 휴직 기간 동안 이직 준비를 하며 얼어붙은 채용 시장이지만 기간을 가지고 준비해 더 나은 회사로 옮길지, 공부를 하며 다른 일을 알아볼지.. 정해진 게 아직 하나도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겐 이 휴직이 너무도 간절했단 사실이다.
어렸을 때부터 난 언제나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수많은 계획을 세우며 또 그 계획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계획을 짜고 새로운 일을 저지르는데 막힘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 번아웃은 나에게 당황스러운 사건이었고, 어쩌면 불도저 같이 앞으로만 가던 나에게 조금은 쉬어가며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보라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