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계를 낸 지 10일 차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는 그렇게도 가지 않던 시간들이
마치 학교 다닐 때 방학 마냥 휴직계를 내고 난 후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
휴직계를 내고 나서 첫 4일 정도는 사실 나에게는 일과 완전히 분리되어 나에게만 집중하고 힐링할 시간이 필요하다던 상담사의 조언에도 불구 매일 한두 번은 회사 슬랙 메신저와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며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직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야 될 사람이 없나 확인했다.
그 주에 하필 미팅이 여러 개 잡혀있기도 했고,
내 번아웃의 주원인 제공자이던 매니저가 내 업무를 다 커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괜히 나와 업무를 함께하던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조차 피해를 주지 않고 싶어서였을까..
아님 내가 잠시 사라진 그 며칠 동안 내가 얼마나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걸 은연중에 확인받고 싶었던 맘일까..
당장 미팅이 있었던 몇몇 파트너들에겐 개인 메시지를 보냈고, 이메일은 자동회신이 되게 설정해놓았고, 슬랙 상태 메시지에는 휴직 중이니 매니저에게 연락하라고 표시해 두고, 휴직에 필요한 서류들은 모두 제출한 금요일, 결국 난 나를 위해 휴대폰에 있던 업무 이메일을 로그아웃하고 슬랙을 지워 버렸다.
분명 일단은 쉬라는 상담사의 말이 있었음에도 불구 3개월이라는 딱 정해진 방학이 생긴 나에게 3개월 후를 생각하지 않고 푹 일단 쉰다는 건 너무 어려운 숙제였나 보다.
상담사가 추천해 준 스트레스 호르몬을 조절해 주는 영양제를 먹기 시작했고,
복잡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다가 내일 출근을 생각하며 먹었던 멜라토닌 섭취를 10일 중 3일만 먹는 발전을 만들고, 아무것도 안 하고 티비만 보고 인스타그램 뉴스피드만 멍하니 스크롤하다 더 불안하고 우울해질 것 같은 마음에 작은 것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지금껏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 왔지만 하고 싶었던 그리고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것부터 하며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일기는 매일 쓰던 건데 사실 지난 월요일 번아웃의 정점을 찍은 날부터는 그냥 자기 전에 일기를 쓰기엔 내 머리가 너무 복잡해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못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참을 방치해 둔 냉장고 문에 붙어있던 보드를 깨끗이 닦아 내고, 하루하루 해낸 작은 내 성취들을 하루 동안 기록 하기로 했다.
우선은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집을 먼저 돌보기로 했다. 우리 집은 로봇청소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내화를 신고 다니고 아이가 있는 집도 아니라 부끄럽지만 로봇 청소기를 매일 돌리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돌려도 많이 돌린 거고 사실 얼마나 자주 돌리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 청소부터 하기로 했다. 청소기를 돌려 놓고, 큰 빨래 작은 빨래를 위한 세탁기를 거의 매일 돌리고, 식세기를 돌리고, 손설거지를 하고.. 이사 후 기부해야지 하고 모아둔 옷들은 쇼핑백에 넣어둔 채 창고에 처 박아둔 지 3년째 된걸 다시 꺼내 잊지 않기 위해 현관 위에 드디어 빼 놓았다.
그리고 소소한 것들이라 미뤄뒀던 집안 곳곳의 작은 프로젝트부터 하기로 했다. 몇 주 전 주문해 둔 아이키아 제품을 드디어 제자리에 두고 조립해야 되는 걸 했다. 재료만 사놓고 하지 못했던 집수리를 하고, 재료만 사놓고 시간이 없어 못 만들던 베이킹을 다시 하고, 없는 시간을 쪼개하던 근력 운동 말고도 유산소 운동을 조금씩 늘려갔다.
봄에 갔으니 내년에나 또 가겠지 했던 한국행 티켓을 쉬는 동안 한번 더 가기 위해 티켓을 예매하고, 겨울에 남편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미루고 미루던 우리의 신행 올인클루시브 리조트도 드디어 예약해 버렸다.
맛있는 걸 먹고, 몇 달 전부터 하고 싶었던 덱사 스캔도 받아보고, 그렇게 주말에 나간 김에 외식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왔다. 집으로 와선 영화도 보고, 이런저런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예능도 틀어놓고
스트레스 지수를 실시간으로 측정하기 위한 앱을 다운로드하고, 불안한 마음에 뭐든 기록하고 싶어 빈 공책에 3개월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진로 방향들을 적어보고, 3개월 동안 뭘 할 수 있을지 적어보고, 챗지피티에게 하소연하며 어떻게 이 번아웃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고 상담도 받아보고, 오래전 사서 한번 읽고 넣어두었던 한국 책들을 읽고, 아무런 생각 없이 뉴스피드를 보다가 알게 된 사이먼 스큅의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를 우선 온라인 도서관에 예약을 걸어놓고, 기다리는 동안 샘플을 킨들에 다운로드하여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머릿속이 복잡하고 일단 뭔가 하고 싶은데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이것저것 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쉬다 보면 결국 답이 나올 거라 믿고 싶다. 15년 전 처음으로 미국에 오기 전 적어놨던 수많은 버킷리스트를 10년 전 인턴하다 우연히 발견하고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뤘다는 것을 알게 됐던 거처럼, 지금 이 글들도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 와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이 힘들었던 시간들이 결국 좋은 방향으로 터닝 포인트가 되어 주었구나 하기를 바라며 나는 또다시 내 옛날 블로그에 적힌 옛 버킷리스트를 보면 10년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 냈는지 확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