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후 휴식 - 11일 차
몇 년 전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했었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받았었다.
"잠시 쉬어가도, 달라도, 평범해도 괜찮아! 모든 것이 괜찮은 청춘들의 아주 특별한 사계절 이야기"
시험, 연애, 취업...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은 오랜 친구인 재하와 은숙을 만난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재하', 평범한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은숙'과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 끼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며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을 맞이하게 된 혜원. 그렇게 특별한 사계절을 보내며 고향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를 깨닫게 된 혜원은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데...
그 영화를 바로 볼 순 없었지만 워낙 인기가 있어 나도 몇 달 뒤에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람들이 극찬하는 만큼 재밌는(?) 영화라고 공감하진 않았다, 너무 평화로워 조금 지루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내가 재밌게 본 부분은 맛있는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정도?
그때 나는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에 들뜬 사회생활 햇병아리도 아니고 알에서 막 깨어나던 시기였다. 모든 게 새롭고 돈을 내고 공부하는 게 아닌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자체가 신났을 때 사회생활에 지쳐 지루한 시골로 돌아가는 나보다 겨우 한두 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 비행기에서 영화 "3일의 휴가"를 보았고 그때 또한 주인공과 주인공 엄마와의 서사에 눈시울을 붉혔지만 UCLA 교수까지 되며 성공했지만 엄마가 죽은 뒤 김천에 내려와 시골 밥집을 운영하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주인공의 결정에까지 공감을 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미국에서도 그리워할 수 있고 엄마 밥을 미국에서 만들어 먹고살아도 되는데 꼭 커리어를 완전히 버리고 갈 필요가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올해 초였나 예능 전참시에 배우 최강희가 나오는 편을 보게 되었다. 최강희는 너무 힘들어서 연기를 그만두고 싶었고, 이로 인해 가족들에게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으며, 번호까지 바꿔 단절하는 시간을 가지며 친구네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고 친한 언니 (김숙 송은이)들의 집 청소를 해주는 알바를 하며 지냈다고 했다. 그걸 보며 나는 최강희의 청소 스킬을 감탄하며 보고 배워야지라는 생각만 했지 어떻게 좋아하는 일(커리어)을 완전히 버리고 단순 노동을 하며 치유가 된 그 마음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나도 그 영화와 배우들처럼 느끼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적당히 잘했다. 조금만 노력해도 노력대비 좋은 아웃풋이 나왔고,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고 나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고 말해준 엄마의 말에 나는 적당히 내가 원하는 만큼 하며 결과가 꼭 최고가 아니라도 슬퍼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던 좋은 면은 있고 뭐든 잘될 거라는 무한 긍정회로 - 그렀기에 15살이라는 나이에도 먼 길을 떠나며 설레는 마음만 가득했고, 대학을 입학하러 또 다른 나라로 갈 때도, 인턴쉽을 하러 또 다른 나라로 옮겨갈 때마다 나에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걱정보단 이번엔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설렘만 가득했었다.
그렇다고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결심했던 대부분의 일을 해내고 말았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나는 뭐든 잘하는 사람이라 했고 그런 말이 부담감이나 압박감이 된 적도 없었다. 차이라면 완벽하게 되지 않아도 쉽게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내 성향이었고 그랬기에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 있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대학교 시절 연애 정도? 그건 나 혼자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어려웠고 울기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조차 졸업하기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기말고사 치고 2주 후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결혼식을 올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내가 생각한 인생 최고 난도 미션까지 클리어하며 아무리 뉴스에 안 좋은 일들이 많이 나오더라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고 더 나아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그렇게 완전히 멘털이 무너지며 나도 그 공감하지 못한다던 영화와 배우의 방법으로 치유하게 되었다. 사람의 본능인 걸까?
불안한데 아무것도 할 의욕은 안 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끝없는 무기력 감이 더 심해질 것만 같고..
그래서 내가 처음 시작한 건 집안일이었다. 원래도 그렇게 더럽게 지낸 건 아니지만 대청소를 하고 이곳저곳 급하지 않으니 흐린 눈으로 보던 곳들을 손보고, 그 모든 것을 일기에 기록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당장 내가 3개월 뒤 이직준비를 바로 시작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를 잘 보냈고 오늘 하루 또 뭔가 발전하는 성과를 이루었다는 생각에 막연히 불안하던 마음이 잠재워졌다.
아마 그 영화의 주인공들도 배우 최강희 님도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서 보듯 만약 사회생활이 상위 욕구인 애정 소속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와 같이 외부에서 채워지는 욕구와 관계가 있었고 거기에서 불만족 혹은 문제가 생기며 심리에 전반적인 불안감을 야기한다면
결국 제일 기본 욕구인 생리/안전 욕구 - 즉 의식주와 관련된 행동들을 하며 안정감을 찾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나의 공간인 집에서, 깨끗하고 정돈된 공간에서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안정을 취하고 나서야 다시 한번 바깥으로 나갈 힘을 얻게 될꺼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