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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Sep 21. 2019

기억해야 할 별들을 위하여 1
- 청년 심산 김귀정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시사인 연재) 

아마 너도 ‘586 세대’라는 소리를 들어봤을 거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라는 뜻으로 25년쯤 전 최신형 컴퓨터 사양이었던 ‘386’ 컴퓨터에 빗대 나온 이름이야.




민주화 투쟁의 중심이 됐던 386 세대는 나이를 먹어 486이 됐고 어느덧 586까지 올라갔는데 최근 이들은 일종의 ‘공공의 적’ 급으로 취급받는 일이 잦단다. “노력에 비해 큰 혜택을 누리면서도 배려가 없다(<한국일보> 고재학 칼럼)”라거나 “후배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시대는 빠르게 변해가는데 우리 사회의 새로운 어젠다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이동학 전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라는 비판은 약과고, “꿀 빠는 세대에 완장 찬 꼰대(<한국경제> 오형규 칼럼)” 같은 가시 돋친 독설의 대상이 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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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대는 자라고 나이 들고 늙으면서 그 세대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와 맞닥뜨리게 돼. 한 세대 전부가 그 일에 몰두하지는 않고 대부분 잘 먹고 잘살 생각에 골몰하지만 그 가운데 누군가는 역사의 부름에 응하고 그들의 외침이 외롭지 않게 될 때 역사는 둔중한 발걸음을 떼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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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이 486이 되고 586에 오르는 30년 동안 아빠는 이 세대가 어느 정도 할 일을 했으면서도 또 다른 면에서는 참혹하게 실패했기에 오늘날 공공의 적 수준의 욕을 먹고 있다고 생각해. 정작 ‘꿀을 빤’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얼굴 붉힐 수는 있겠으나 “우리 자식들의 삶은 우리보다 못할 것”이라는 푸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쟁취했노라 큰소리는 쳐보겠으나 “그래서 만든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냐”는 반문에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아빠는 586이 ‘286’이었을 때를 돌아보고 싶구나. 네게는 아빠가 어렸을 때 지겹게 들었던 한국전쟁 이야기처럼 ‘꼰대들의 잔소리’로 들릴 수 있음을 잘 안다. 하지만 전국에 수백만 ‘286’ 가운데 소수(다수인 적은 드물다)가 극악한 독재정권에 맞서 보여주었던 용기와 헌신은 우리 역사의 빛나는 유산이고, 그 빛을 좀 더 크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네가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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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1980년대를 살았던 ‘286’, 맨 앞의 ‘2’자를 바꾸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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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봄, 명지대학교에서 한 대학생이 진압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들끓는 분노가 전국을 휩쓸었고 어떤 이들은 분신이라는 극한의 몸부림으로 저항에 나서기도 했지. 5월25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열렸고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근처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가 퇴계로 3가부터 극동빌딩, 대한극장 앞까지 가득 차자 경찰은 학생들의 퇴로를 막고 세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이른바 ‘토끼몰이’ 진압을 벌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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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아우성을 치며 좁고 옹색한 골목으로 스며들었지만 도망갈 데가 없었어. 주차된 차량과 길거리에 내놓은 짐에 걸려 학생들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였지. 당시 공개된 사진을 보면 사복 경찰들이 쓰러져 있는 학생들의 등을 짓밟으며 걷는 장면이 나온단다. 그렇게 엄청난 경찰의 폭력 앞에서 아우성을 치던 학생들 틈에서 누군가 찢어지는 소리를 질렀어. “대학생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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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에 경찰의 포위가 풀렸고 그 틈 사이로 다른 남학생 하나가 길바닥에 쓰러진 한 여학생의 모습을 발견했어. 성균관대 불문과 88학번 김귀정이었단다.


아빠도 88학번이니 동기라고 할 수 있지만 만약 실제 마주했다면 말을 놓기가 많이 어색했을 거야. 김귀정은 1966년생 말띠였거든. 원래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 85학번으로 입학했어. 어머니가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던 상황에서 순탄한 대학 생활을 할 수가 없었지.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왔는데, 대학을 다니기 위해 공부를 제쳐두고 일을 하러 다닌다”라고 일기에 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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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한다. 일을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는 1988년 성균관대 불문과에 입학해 새로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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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의 친구들은 대개 86학번이나 87학번이었겠지. 영화 <1987>에서 네가 본 거대한 물결의 주축이었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던 또래야.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생활고와 싸워야 했던 김귀정은 어느새 극렬한 운동권이 되어버린 친구를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린 적도 있다고 해.


사실 아빠 기억 속에도 데모가 배부른 사람들의 사치로 보인다고 말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너희들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얘기하지만, 나는 내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얘기였지. 김귀정도 아마 그랬을 거야. 다시 들어온 대학에서 그는 미처 몰랐던 역사에 눈을 뜨게 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변했다’고 낙인찍었던 친구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학생으로 변신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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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해였던 1991년에 김귀정은 학교와 사회 사이의 개찰구 같은 지점에 섰어. 그도 필시 생각이 많았을 거야. 운동을 해나갈 전망과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수십 년 노점을 하며 자식들 건사한 어머니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장차 뭘 하고 살 건지 불안감도 밀려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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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동아리 일기장에 쓴 글을 보면 불안과 다짐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려 애쓰는 한 청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난 무엇이 될까?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난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한때 이 아빠와 친구들은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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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도 저 일기를 쓰면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았을까. 노래 부르며 감상에 젖다가 강하게 머리 흔들고 어금니를 앙다물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김귀정은 거리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엄지손가락만큼 작다고 해서, 만화 여주인공처럼 착하고 헌신적이라고 해서 ‘엄지’라 불리던, 수줍은 성격 탓으로 남 앞에 잘 나서려 하지 않았던(동아리 선배의 회고)” 김귀정은 386, 486, 586이 될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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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했던 다짐이야. 어떤 잘난 사람들은 말끝마다 혁명을 주창하고 해방을 부르짖었으나 그러기엔 깜냥이 부족했던 286들은 대부분 김귀정의 다짐 정도를 곱씹었지. 아빠를 포함해서 말이야.

현실 속에서 점점 그 다짐의 강도는 줄어들었던 것이, 한때 부당한 역사 앞에서 활활 타오르던 열정을 ‘내 가족’과 ‘내 연봉’과 특히 ‘내 새끼’에 쏟아부었던 것이 86 세대의 비극이 아닐까 생각하게 돼(그렇지 않은 사람도 매우 많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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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김귀정도 불안했다. 김귀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다짐을 했다고 생각해. ‘나 잘 먹고 잘살겠다고만 살지는 않겠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져버린 김귀정의 ‘최소한’을 기억하고 싶구나. 몹시 아끼다 잃어버렸던 구슬을 낡은 서랍에서 다시 찾은 양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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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최대한’은 ‘최소한’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최대한 뭘 할 수는 없을망정 최소한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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