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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Sep 21. 2019

주왕산을 걸으며

주왕은 누구일까 

주왕산을 걸으며 


 지난 추석, 수험생 딸과 그 뒷바라지해야 할 아내를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갔고 부모님과 여동생 가족들과 함께 청송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예전에 촬영차 잠깐 스치고 지나간 기억은 있으나 여유 잡고 이곳 저곳을 둘러본 것은 처음이다. 25년 전 지역 풍물 기행 프로그램 조연출하던 시절, 선배들은 “한국의 진짜 오지는 경북 북부”라고 푸념했었다.  특히 BYC라 해서 봉화, 영양,청송은 그곳에 가는 시간만 해도 예닐곱 시간을 거뜬히 잡아먹는, 아득히 먼 고장이었다. 요즘이야 고속도로가 종횡으로 오가고 사람들의 발길도 꽤 번다해졌다지만 그래도 청송으로 들어가려면 몇 차례 귀가 좀 먹먹해오는 고갯길을 두어 개 넘어야 했다.


 청송 제 1의 볼거리라면 단연 주왕산이다. 월출산, 설악산과 더불어 한국의 3대 암산(巖山) 중의 하나라는 주왕산은 초입에서부터 흡사 선계(仙界)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느낌으로 방문객을 압도한다. 노인들 모시고 간 터라 길고 험한 길은 어려웠지만 왕복 두어 시간의 걸음만으로도 명산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넉넉했다.  어김없이 탐방로 입구에서 입장료 챙기는 탐욕스런 절간에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그 기와 너머로 우람하게 버티고 선 기암(旗巖)의 절경에 이마가 펴진다. 



 그런데 왜 주왕산(周王山)일까.  중국의 고대 왕조인 주나라의 왕이 한반도 동남방 내륙 깊숙한 고장과 인연을 맺을 까닭이 없는데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됐을까.  전설에 따르면 주왕은 주나라의 왕이 아니라 당나라 덕종 때 살았던 주도(周鍍)라는 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신라까지 도망와 주왕산 깊숙이 숨어들었는데 신라는 군대를 보내 중국의 반역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전설에는 신라군을 지휘한 장군 이름까지 나온다. ‘마일성 장군’ 주왕산 줄기줄기 피어린.... 어 이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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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주왕산 곳곳에는 이 주도, 즉 주왕과 신라 마장군의 전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위에 언급한 주왕산의 대문이라 할 ‘기암’(旗巖)은 주왕이 깃발을 꽂고 마장군을 맞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주왕산 어귀의 대전사 (위의 욕심 많은 절간)는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을 위로하고자 지었다고 전해지며, 주왕이 쌓았다는 산성 터도 있고,주왕산 곳곳에 피어나는 붉은 수달래꽃은 주왕의 피라고 하며 물이 떨어지는 바위틈 동굴인 주왕굴에 숨어 있던 주도는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에게 걸려 죽었다고 돼 있으니까 말이다.  


 

 정말 당나라 반역자가 신라까지 도망 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기록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았을 듯 싶다. 하지만 오히려 신라의 반역자가 당나라에서 왔다는 후광(?)을 활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려 태조 왕건도 자신이 황제가 되기 전, 천하를 주유하던 당나라 숙종의 사생아의 후손이라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꾸며내지 않았던가. 덕분에 까마득한 후손 충선왕은 원나라 학자에게 “님이 숙종 후손이라는데 숙종은 궐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데 뭔 고려까지 가서 자식을 낳았을까요?”라는 힐난을 듣고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신라에 반대한 풍운아 하나가 나는 당나라에서 온 아무개다 하면서 주왕산 일대를 주름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천조국’ 타이틀은 유력하고 유용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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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주(周)설의  신라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강릉 지역으로 이주했던 김주원(金周元)이다. 선덕왕이 죽은 뒤 왕을 결정할 화백회의가 열리지만 김주원은 갑자기 홍수가 난 냇물 때문에 제 시간에 궁궐에 당도하지 못했고 정치적 맞수이던 김경신에게 왕위를 헌납하게 된다. 그런데 설마 왕 자리 걸린 일에 냇물 정도가 문제였을 것 같지는 않고 김경신이 먼저 궁궐을 차지하고 내가 왕이요 했을 가능성이 크지만(이 사람이 원성왕).


 원성왕이 즉위한 후 김주원은 거창한 행렬을 이끌고 명주, 즉 강릉으로 향한다. 그곳에 자신의 농장 등 세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강릉 김씨의 시조가 이 사람이다. 원성왕도 명주군왕 칭호를 내려주며 달랬다지만 김주원의 속은 무척 쓰렸을 것이다.  그 쓰라림을 행동으로 표출한 것이 둘째 아들 김헌창이었다. 김헌창은 오늘날의 공주인 웅천주 도독을 맡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켰고 신라 9주 가운데 5주의 호응을 얻어내며 기세를 올렸지만 그때까지는 제대로 기능하던 신라 중앙군에게 토벌당한다. 


 그러나 김헌창의 본가라 할 명주, 즉 강릉 지역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헌창이 자살하고 그 아들 김범문이 대를 이어 신라 조정에 맞서다 죽었지만 명주는 조용했다. 김주원이야 이미 죽고 없었으나 김주원의 장남 김종기 이하 강릉 김씨 본가는 전혀 난에 호응하지 않았다. 주왕산 급수대의 이름은 김주원이 급수대 꼭대기에 기거하면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마셨다는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주왕산 풍경을 두고 “반드시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니더라도 그대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갈 수 있다.”고 극찬하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김주원은 번잡하고 살기돋는 중앙 정치에 넌덜머리를 내고 풍광 좋은 곳에서 여유작작 살고 싶어진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주왕산은 뭔가를 이뤄 내려다가 허무하게, 또는 막판에 꺾여 버린 사람들의 비원이 서린 산 같다. 높지 않되 깊고, 산세는 아름다우나 결코 만만하지 않다.  구태여 주도, 즉 주왕이 죽었다는 주왕굴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본 것은 그 슬픈 최후의 느낌을 만분의 일 조각이라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웬 법당이 차려져 있어서 허허 웃고 내려와야 했지만, 주왕이 세수를 하려 했다는 동굴 입구의 물줄기는 가냘프게나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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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의 급수대는 올려다보기만 했으나 그 까마득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아마 주왕산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협곡과 폭포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것 같다. 그 위에 선 김주원은 서라벌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궁궐에 먼저 들어가서 금관을 차지하고 싶었으나 한 발 빨랐던 김경신 때문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절 싫어 떠나는 중 신세가 돼 동해안 강릉으로 향했던 김주원. 청송과 주왕산은 그 도상에 있었다. 혹시 그는 당나라에서 피난 온 왕 행세를 하던 주도, 즉 주왕의 흔적을 볼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먼 훗날 학봉 김성일이 지은 시심(詩心)은 그 마음에도 일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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披草尋行闕   풀숲 헤치며 궁궐을 찾노라니 

山椒落日低   산마루 지는 해 낮게 드리웠네

階平已無級   계단 무너져 층계 없어졌고 

瓦解半成泥   기와는 부서져 반 진흙 되었네

制陋非堯殿   규모 초라해 요임금 궁전만 못하고

林深是鳥栖   숲은 깊어 산새 서식지 되었네

興亡千古恨 흥하고 망하고 천고의 한을 품고

長嘯過溪西 길게 휘파람 불며 시내 서쪽 지나네 

좋은 산이다. 또 가 보고 싶다. 아내와 함께 등산화 챙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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