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산성의 이야기들 1 – 비운의 무장 송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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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山城)을 즐겨 찾는다. 별반 관심없는 가족들 데리고는 가기 어렵지만 친구들이랑 다니거나 답사를 잡을 때 근처에 산성이 있다면 가급적 빠뜨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경치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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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보통 주변을 훤히 감제(瞰制)할만한 위치에 있고 그 고도가 낮건 높건 주변의 풍광이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만들어지니 경치가 좋을 수 밖에 없다. 또 대개 산성에는 이런저런 사연들이 서려 있다. 평지성인 읍성보다는 산성에서 여러 전투가 벌어졌고 그를 위한 대비도 많았으니 그 돌멩이 하나 성가퀴 하나에 이야기가 똬리를 틀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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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 지대로 이름난 호남에도 산세 드높은 곳은 많고 산성도 적지 않다. 호남의 3대 산성이라면 담양의 금성산성, 무주의 적상산성, 그리고 장성의 입암산성을 든다. 얼마 전 입암산성을 찾았다.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626미터의 입암산의 골짜기를 끌어안고 능선을 따라 지어진 포곡식 산성이다. 산 이마께를 둘러 만들어지는 테뫼식 산성보다 규모가 당연히 크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는 꽤 큰 분지가 형성돼 있어서 군대와 백성이 머무르기 좋은 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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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길이가 5~6킬로미터에 이르고 (남한산성 본성 길이가 9킬로미터쯤 된다) 태인, 정읍, 고부 등 주변 고을 백성들이 유사시 성에 들어와 농성하게 돼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전남 장성은 ‘Yellow City’로 도시의 트레이드 마크를 삼아 표지판이며 뭐며 다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있는데 입암산에서 발원하여 장성을 가로지르는 영산강 지류가 황룡강(黃龍江)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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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 계곡을 거슬러 입암산성 남문터에 이르면 이 황룡강의 발원지가 있다.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기세를 올렸던 황룡강 전투가 문득 떠오르지만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입암산성의 위용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성벽을 둘러볼 길이 마땅치 않고 입암산 정상인 갓바위, 즉 입암(笠巖)으로 오르는 길은 과거 산성 안의 분지를 관통하는 길이다. 그래서 능선을 따라 연결된 성벽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어렵고, 짬짬이 드러나는 성벽에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하지만 성의 내력은 결코 얕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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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부터 성은 있었던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몽골군 6차 침입 당시 이 지역까지 쳐내려온 몽골군이 발이 걸리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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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6차 침입은 몽골군이 고려를 말려 죽이기로 작심을 하고 덤벼든 전쟁이다. 온 나라를 초토화하고 사람들을 다 잡아가도 고려 조정 너희가 강화도에 버틸 수 있나 보자고 칼을 갈았다고나 할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만 20만 명이 넘었다고 기록된 당시로서는 ‘절멸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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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몽골군은 고려 조정의 경제적 기반이라 할 호남 지역까지 넘본다. 고려 조정이 지방 백성들에게 내놓는 대책이라고는 산성에 들어가거나 섬에 틀어막히라는 것이었고, 몽골 장수 자랄타이는 호남의 섬들을 공략할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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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막기 위해 고려 조정이 수군을 주어 내려보낸 장수가 송군비(宋君斐) 등이었다. 이들은 영광까지 내려왔으나 작전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한쪽은 섬으로 가고 송군비는 내륙으로 들어와 이 입암산성으로 들어왔다. 성 안의 방비는 형편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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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수 있는 축은 도망가거나 항복했고 노약자가 주류였다.하지만 송군비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몽골군이 다가서자 노약자들을 성밖으로 내보낸다. “아이고 허리야 삭신이야” 제풀에 드러눕는 이들을 보며 몽골군은 방심한다. “별 것 아니구나.” 송군비는 그 방심을 노렸고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 몽골군의 뒤통수를 쳐서 대승을 거둔다. 몽골 장수 4명을 사로잡았다 할만큼 큰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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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송군비는 꾀 많은 사람이었다.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된 뒤 몽골은 일본을 넘봤고 고려에게 일본 침략의 길잡이를 요구하고 나선다. 몽골에게도 일본은 바다 건너 땅, 고려의 협조가 절실했다. 몽골은 사신을 파견해 일본의 굴복을 요구하기로 한다. 그 안내자로 나선 것이 송군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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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과 평원에만 살던 몽골인에게 바다는 일단 압도적이었지만 송군비는 거제도까지 사신을 수행하면서 엄청나게 겁을 준다. 입암산성에서 몽골군을 속였듯 말이다.
“이게 파도라는 건데요. 지금 보이는 것도 무서우시죠? 거제도만 벗어나 보십쇼. 집채만한 게 넘실거립니다. 우리도 일본 가려면 목숨 걸어야 해요. 열 번 배 뜨면 하나 둘이나 도착하까. 이런 데를 어떻게 가려고 그러십니까. 덕분에 제 목숨도 위태롭겠습니다.” 배에 태우고 거제도 한 바퀴만 돌아도 몽골 사신들은 배멀미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보름은 가야 합니다요.뭐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실 겝니다.” 이러면 더 얼굴이 하애졌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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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사신 흑적 일행은 거제도에서 발길을 돌린다. 송군비는 그들을 따라가면서 계속 바다의 험함과 파도의 높음을 귀에 불어넣었으리라. 몽골과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 처지로 척진 적도 없는 일본을 잡는 일에 끼어들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송군비는 몽골까지 사신들을 따라가서 일본을 굴복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험한 일인가를, 그리고 고려가 일본과 그리 친하지도 않아 몽골에 복속하라 설득할 능력도 없음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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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을 이어온 최씨 정권은 무너졌으나 최의를 없앤 김준, 김준을 없앤 임연과 그 아들 임유무는 원나라에 반항적이었다. 자주성을 지키려는 것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겠지만 말이다. 임유무는 강화도에서 나가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출륙환도는 몽골의 오랜 요구였다) 왕 원종을 가로막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섬과 산성으로 들어가라는 명을 내리며 전쟁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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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는 백성들도 지쳐 있었고 군인들도 힘이 빠져 있었다. 임유무는 몽골과의 항쟁의 상징같은 부대 삼별초 병력에 붙잡혀 목이 잘린다. 이때 임유무에게 충성하던 사람들도 화를 입는데 그 중에는 송군비도 포함돼 있었다. 비운의 최후.
입암산 정상에 오르면 동남쪽으로는 강원도 심심산골을 연상시키는 노령산맥의 첩첩산중이 펼쳐지고 서북쪽으로는 고창과 곰소, 변산과 전북의 평야지대가 일망무제의 바다처럼 펼쳐진다. 아마 송군비도 이 풍경을 둘러보았으리라. 문득 돌아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다가서는 산성 꼭대기에서 그도 고민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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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의 경계처럼 육중한 선택을 요구하는 거대한 역사의 말발굽 앞에서, 무장으로서, 고려의 벼슬아치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못할 일, 하면 안될 일들을 가늠했으리라. 입암산성을 역사에 등장시킨 무장 송군비는 퇴락한 성벽의 돌처럼 잊혀진 채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며 사라져 갔다. 그의 발버둥을 입암산 꼭대기, 갓바위에서 느껴 본다. 이 넓지 않은, 하지만 사연 많은 땅에 살다간 한 무장이 이 바위 위에 섰으리라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