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자연의 친구, 우이령 사람들> 9월 답사 후기
허구헌날 구박과 타박 받는 일이 잦긴 해도 아내와 함께 어딜 다녀오는 것은 즐겁다. 둘이 같은 개띠라 그런지 집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몸이 무겁고 발바닥이 아플 만큼 돌아다니고 집에 와야 쉰 제대로 쉬는 느낌이 나는 것이다. 아이들로부터 적당히 해방된 지금 주말만 되면 아내와는 무슨 명목으로든 돌아다니기 바쁘다. 지난 주말에는 <산과 자연의 친구 우이령 사람들>의 생태 답사에 부부동반으로는 두 번째로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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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그래도 꽃과 나무에 관심이 있는 편이지만 차가운 도시남자에 해당하는 나는 당최 ‘생태’에는 소질이 없다. 인문지리부터 생태식물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한 답사 리더 밤재 선생을 따라 다니면서 주워들은 풍월은 꽤 많은데 다른 이야기들은 대충 기억하면서도 나무와 꽃, 풀의 사연은 뒤돌아선 7초 후면 까먹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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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내는 나더러 기본적으로 정서가 메마른 자라 혹평하며 ‘생태 답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인간도 생태계의 일원이고, 자연의 조화만큼이나 인간의 일상도 변화무쌍하고 신기하기에 내 관심의 발길이 그리로 쏠릴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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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 코스는 장성 백양사와 입암산성, 그리고 다음날 새만금을 잇는 여정이었다. 백양사는 백암산 백양사라 일컫지만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하고, 단풍으로 이름 높은 내장산 이상으로 그 화려한 단풍으로 이름난 곳이다. 절 초입에 있는 쌍계루와 그 앞의 연못을 찍어 페북에 올렸더니 뭇 사람들이 다투어 그곳의 가을 풍경을 논하는 걸 보니 그 유명세를 능히 짐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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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단풍철은 아니었기에 그 정취를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푸르른 산과 하얀 암벽, 그리고 세월의 때묻은 기와 지붕과 붉은 기둥들이 연못의 수색(水色)에 흔들리며 비추이는 모습은 단풍철 아니어도 족히 사람 눈을 들뜨게 한다. 단풍철 주말에 다시 와 봐야지 하는데 옆에서 누가 오금을 박는다. “아서라. 톨게이트에서부터 여기까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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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입구로 이어지는 숲길은 굵직한 갈참나무와 단풍나무들로 빼곡하다. 그런데 묘한 향기가 난다. 귤 냄새 같기도 하고 유자 냄새 같기도 한 맛있게 시큼한 냄새. 식물 박사 밤재 선생에게 물으니 비자나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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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톤치드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이 나무의 북한계가 이 전남 장성 땅이라고도 했다. 이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최고로 치고, 풍운아 김옥균도 비자나무 바둑판을 망명길에도 가지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런 향을 내는 바둑판이라면 바둑알 가지고는 알까기만 한 나도 바둑을 배우고 싶어질 것 같다. 차제에 바둑을 배워 알파고와 자웅을 겨뤄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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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찰이다. 원래는 산 이름 따서 백암사라 불렀는데 백양사(白羊寺)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 시대 한 고승이 설법을 하는데 양들이 몰려와 들은 이후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길 잃은 어린양들은 많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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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초입에는 이 절이 스승으로 모시는 고승들의 비가 서 있다. 가장 우뚝한 비석에 쓰인 글을 읽으니 ‘만암대종사 고불총림 도량’이다. 그리고 비석의 발치에는 만암선사가 자신의 화두였고 제자들에게도 깅조했던 화두 ‘이 뭣고’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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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 선사는 백양사의 최근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어머니의 태몽이 흰 양을 끌어안는 것이었다는데 백양사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인연이었는가 보다. 만암은 조실부모 후 출가하였는데 엄청난 공부로 이름이 알려져 나이 서른 둘에 해인사의 대표 설법자, 즉 강백이 되기까지 한 사람이었는데 ‘이 뭣고’를 화두로 7년 정진한 끝에 득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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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은 득도한 고승으로 산사에 틀어박혀 수행에만 정진하고 심후한 화두만 날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가장 실천적이고 중생과 어울려 살았던 사람이었다. 백양사는 그리 부유한 절이 아니었건만 보릿고개가 오면 죽 쑤어먹을 정도의 식량만 남기고 죄다 사하촌에 풀어 버렸고, 그걸 갚겠다고 추수 때 사람들이 이고지고 오면 난데없는 둑방 공사를 벌여서 일을 시킨 후 노임으로 나눠 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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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후배 승려들 교육은 엄격하게 시켰고 또한 절 밖 산 아래 속세 교육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경술국치 후 바로 광성의숙을 세웠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사람이다.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이 불교의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도 그를 물리치고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그였으나 막상 조계종 종정이었을 때 대처승들을 절에서 즉각 몰아내자는 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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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를 교화승(대처)과 수행승(비구)으로 나눠야 한다. 대처승들에게도 활로를 열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백양사만 해도 만암과 그 제자 서옹 (후일의 조계종 종정) 외에는 다 대처승이었다. 그래서 법당 안에는 만암과 서옹만 들었고 나머지는 마당에서 예불을 드렸고 대처승의 경우 상좌(후계자)를 들이지 않는 등 점차 비구승들로 바꿔 가도록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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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을 절에서 몰아내라.”고 명령하고 비구승들이 공권력과 깡패까지 동원하여 대처승들을 몰아내고 절들을 접수하는 이판사판 야단법석이 벌어지고 조계종 젊은 승려들이 종조(宗祖)를 태고조사 보우에서 보조국사 지눌로 바꿔 버리기에 이르자 조계정 종정 자리를 박차고 백양사로 돌아왔고 얼마 후인 1957년 입적한다. 가장 원칙적인 사람이 가장 폭넓었던.....완강한 한국사람들의 역사에서는 매우 드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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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가 달려왔다. 저녁 공양을 하는데 만암스님이 무심코 “저 녀석도 갖다 주어라”고 했다. 제자가 “저는 이미 밥을 먹었습니다.” 하니 만암은 천정을 가리켰다. “너 말고 또 먹을 놈이 저 위에 있어.” 방에 놓여 있던 그릇에 음식을 담아 천정에 놓으니 습관이라도 된 듯 쥐가 기어와 음식을 먹고는 그릇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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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도 먹어야지. 그래야 조용하고, 내가 잠을 편히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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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마을 사람들을 훌륭히 다스리는 이장에게 인민군 장교 정재영이 그 ‘령도력의 비밀’을 물었을 때 이장은 “뭘 잘 멕여야지.”라고 대답한다. 어쩌면 성불(成佛)의 시작도 중생들을 ‘잘 먹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사람부터 쥐새끼까지. 물론 그를 인도하는 이의 인생은 만암의 그것처럼 피곤하고 고단하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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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의 손때가 묻은 대웅전 (1917년 건립)에서 만암 스님의 생전 모습을 본다. 깐깐함과 후덕함이 반반씩 뭉친 얼굴. 처진 입술은 단호하나 한풀 내려간 눈매는 순후하다. 백양사 대웅전이나 300년 된 극락보전 등을 우리가 오늘날 구경할 수 있는 것도 만암 스님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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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빨치산 토벌을 위해 불태워진 절이 한둘이 아니거니와 백양사도 그 위기에 처했고 국군은 소각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만암은 끝까지 버텼다. 그 후 전설은 여러 갈래지만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국군은 짚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척하고 철수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절에 불났으니 가서 끄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달음에 달려올라와 “부처님 같은 스님” 만암과 백양사를 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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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구경을 두루하고 돌아와 쌍계루에 오르니 다시금 숲과 물의 오묘한 어우러짐에 취하고 비자나무 향에 눈을 감는다. 단풍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불무릇은 타오르듯 피어올라 나그네의 마음을 건드리고 연못 곳곳의 잉어는 펄쩍이는 소리로 잔잔함에 파묻히는 고막을 간지럽힌다. 그 풍광을 차곡차곡 마음애 개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백양관광호텔’이 눈에 들어온다. 허어 10년 전, 2012년 ‘백양사 도박 사건’이 발어진 것이 저 호텔의 ‘스위트룸’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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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소개된 만암 선사의 ‘생쥐 공양’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자는 수산 스님으로 백양사를 중심으로 한 고불총림의 방방이셨는데 2012년 91세를 일기로 열반하셨다. 그런데 그 49재 이후 백양사 주지 등 8명이 이 호텔 스위트룸에서 판돈 수백만원의 도박판을 벌였고, 이걸 동료 승려가 몰카로 찍어 유포하면서 불거진 것이 ‘백양사 도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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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풍경 보고 나와 한껏 흥에 취한 아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문 채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10년 전 그날, 아마 만암 선사와 서옹 스님과 수산 스님은 극락에서 이 사바세계를 향해 이렇게 합창하셨으리라. “이 뭣고!” 다음 목적지는 입암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