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79 엔진을 탑재한 F-16
F-16/79는 미국이 동맹국에 판매하고자 성능을 의도적으로 낮추도록 J79 엔진을 탑재한 기체이다. 원래 F-16 전투기는 프랫 휘트니에서 개발한 F100 엔진을 탑재한다. 그런데 F-16을 개발한 제너럴 다이내믹스에서 F-16의 성능을 미 정부의 요구대로 한 단계 낮추고자 과거 F-104 또는 F-4 팬텀에 탑재되던 GE의 J79 엔진을 F100 엔진 대신 F-16에 넣은 것이다. 물론, J79 엔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J79 엔진을 기반으로 성능을 소폭 향상한 'J79 combat plus'를 탑재했었다.
그러나 KODEF 군용기 연감 2012~2013에 따르면 J79 엔진의 최대추력은 17,000 파운드이다. 그리고 이를 개량한 J79 combat plus의 최대추력은 20,000 ~ 21,000 파운드의 추력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원래 F-16에 탑재되던 F100 엔진의 최대추력은 대략 23,000 ~ 29,000 파운드에 달한다. 문제는 추력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F100 엔진은 1960년대 후반 J79 엔진보다 가벼우면서 더 높은 추력을 낼 수 있는 엔진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던 ATE, Advanced Turbine Engine 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된 엔진이었다. 즉, F100 엔진은 J79 엔진보다 더 큰 추력을 낼 수 있음은 물론이며 더 가볍기까지 했다.
그런데 F-16에 J79을 탑재하는 과정에서 F-16 전투기는 J79가 기존 F100보다 더 높은 작동온도를 가지는 바람에 열로 인한 기체 손상을 방지하고자 기체 후미에 900 kg 가량의 열차폐막을 엔진 주위에 두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J79 엔진은 F100 엔진보다 연비도 좋지 못했다. 종합하자면, F-16/79는 엔진 추력은 더 낮아지고, 기체는 더 무거워졌으며, 연비가 나빠 항속거리도 대폭 줄어들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성능을 높이고자 하는 군용기 시장에서 의도적으로 성능을 대폭 낮췄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 제3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지미 카터는 무기 수출 통제 정책을 실시했다. 군축을 지향했던 지미 카터는 미국의 우수한 전투기들이 동맹국들에게 제한 없이 판매된다면 공산권에서도 이에 맞서 우수한 전투기를 개발해 공산권 국가들에 판매하여 결과적으로 국제 정세를 불안케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국제 정세란 으레 그렇듯 '예외'를 가진다. 우선, F-16 개발 초창기에 미 공군과 협약을 통해 경전투기 선정 기종을 자신들의 노후한 F-104G 대체 기종으로 채택할 것을 약속했던 NATO 4개국(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은 F-16을 문제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최우선 동맹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이란(1979년 이란 혁명 이전)에는 F-16 전투기 도입이 허가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미군 철수에 따른 전투력 공백을 우려한 우리 국방부가 지속적으로 F-16 판매를 요청한 결과 1977년에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SCM)에서 판매 허가를 얻어냈었다. 심지어 '한국 정부에서는 공동생산에 관심을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로 구체적이며 적극적으로 F-16 도입에 나섰었다. 그러나 지미 카터의 한반도 미군 철수는 북한 전력이 예상보다 강력하다는 CIA 보고서와 미 국방부 및 미 의회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투력 공백이 발생하지 않게 되자 가뜩이나 무기 수출 통제 정책을 펼치던 지미 카터는 우리 정부에 F-16 전투기를 판매하여 동북아 군비경쟁을 촉진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인권을 탄압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최신예 전투기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독재자이자 인권탄압을 자행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던 우리나라는 F-16 전투기를 도입하기 여러모로 어려웠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대한항공에 의해 F-5 전투기를 면허생산하여 KF-5E 제공호를 운용하게 된다.
그럼에도 방산업체들은 동맹국들에게 무기를 팔아야 했기에 미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건 채 전투기 개발업체들을 대상으로 FX, Fighter Export (수출형 전투기)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미 국방부는 미국의 도움 없이는 개수 및 형상 변경이 불가능하며, F-5E 보다는 우수한 성능을 가졌으나 F-16A 보다는 낮은 성능을 갖춘 전투기를 정부의 지원 없이 오로지 제작사에서 스스로 개발비용을 조달해 제작할 것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최대 이륙중량 및 항속거리가 미국이 운용하고 있는 전투기보다 확연하게 부족해야 했다.
그리고 미 정부는 이런 전투기를 중국의 눈치를 보며 무기를 판매해야 했던 대만이나 북한과 대치 중이지만 군비경쟁을 유발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의 무기를 도입하게 둘 수 없었던 한국에 판매할 계획이었다. 게다가 1979년에 발효된 미중 수교로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온 미국은 중국에도 F-16/79 전투기 판매를 고려했었다. (다행히 중국 측에서도 F-16/79 도입을 고려했으나 오랫동안 소련제 무기를 운용해 온 중국 입장에서 서방제 무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전투기뿐만 아니라 관련된 시스템까지 모두 바꿔야만 한다는 부담 때문에 중국의 F-16/79 도입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서 제너럴 다이내믹스는 엔진 제작사인 제너럴 일렉트릭(GE)과 연합팀을 구성하여 1979년 11월에 정식으로 F-16/79 전투기 개발을 공표한다. 참고로, 이들은 1980년 기준으로 두 회사가 공동 부담하는 조건에 약 1,800만 달러 가량을 소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F-16/79는 제너럴 일렉트릭의 FSD, Full Scale Development 기체 8대 중 하나였던 F-16B 75-0752 기체를 개조하여 1980년 10월 29일에 초도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애초부터 F-16/79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해 낮은 성능을 낼 수 있도록 제작된 기체였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 개발된 노스롭의 F-20 전투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미 카터가 임기 말에 무기 판매 정책을 완화시켰으며 그의 뒤를 이어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했던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으로 동맹국들은 이제 누구나 돈만 지불할 능력만 있다면 F-16 전투기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나라 역시 1981년에 피스브릿지 1차 사업을 통해 1986년에 F-16C/D 블록 30/32 전투기 40대를 들여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