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 핀 아르헨티나 전투기
지금까지 영국, 독일, 소련, 미국 등 북반구의 강대국을 중심으로 항공기의 개발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후발주자로 스웨덴이나 프랑스와 같이 작지만 얕볼 수 없는 국가들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스웨덴은 볼보, 프랑스는 푸조, 시트로엥과 같이 굵직한 자동차 회사들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정도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던 나라라는 점에서 항공기 개발이 그렇게 낯설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자적으로 제트 전투기를 개발한 나라 중에는 남반구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도 있었다. 지금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지만, 과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서 멀찍이 떨어져 식량을 공급하며 농업과 목축업을 통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게다가 넓은 국토 덕에 전부터 항공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페론 정부의 제조업 육성 정책과 맞물려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를 면허 생산하거나 독자 개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하나의 항공기를 만드는데 지금과 같은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을 때 제트 전투기 개발에 도전했지만 제트 전투기 개발에서만큼은 기술력의 한계를 느끼며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때 독일이 패망해버린다. 이후 독일이 쌓은 수많은 연구 자료들과 엔지니어들은 영국, 미국, 소련의 전리품으로 전락하거나 군사재판에 넘겨지어 처벌받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일부 엔지니어들은 그들을 피해 아르헨티나나 가까운 스페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유능한 엔지니어들도 있었다.
바로 독일 전투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프랑스의 Emile Dewoitine(에밀 드와탱)과 독일의 Kurt Tank(쿠르트 탕크)이다. 특히, Kurt Tank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주력 전투기로 활약한 Fw 190를 개발하였으며 전후에는 영국과 소련으로부터 적극적인 구애를 받은 천재적인 항공기 엔지니어였다.
우선, Emile Dewoitine이 이끄는 팀이 Rolls-Royce Derwent 엔진을 탑재한 Pulqui I을 내놓았다. Pulqui I은 1947년 8월 9일 처녀비행에 성공하며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6번째로 제트 항공기를 독자 개발한 나라가 되었고, 동시에 아르헨티나를 포함해 중남미에서는 최초로 제트 항공기를 독자 개발한 나라가 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갓 독립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영국으로부터 가져온 Derwent 엔진은 추력이 부족해 성능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동시에 비슷한 시기에 개발되고 있던 Kurt Tank의 Pulqui II가 보다 괜찮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어 Pulqui I은 단 한 대만 생산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Kurt Tank 박사가 이끄는 팀은 전쟁 말에 He 162에 밀려 양산되지 못한 Focke-wulf Ta 183을 기반으로 Pulqui II를 개발하였다. Ta 183은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굉장히 진보적인 디자인을 가진 기체로서 오늘 다루는 아르헨티나의 제트 전투기뿐만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의 제트 전투기 설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47년 62명의 개발팀을 이끌고 아르헨티나로 넘어온 Kurt Tank은 Ta 183을 중심으로 연구를 이어나갔고 마침내 1950년 6월 27일 Pulqui II는 성공적으로 처녀비행을 마쳤다. Pulqui II는 전작과 다르게 40도 젖혀진 후퇴익을 가졌으며 F-86, MiG-15와 상당히 흡사했다. 또한 당시 항공기의 성능은 속도로 평가되었는데, Pulqui II는 최대 시속 1,080km의 속도를 낼 수 있어 미국의 F-86이나 소련의 MiG-15와 비교해도 손색없었다.
물론 저속에서 안정성이 나빠 착륙하는 중에 사고가 일어나고 2기의 실험 기체가 파괴되는 바람에 곧바로 양산에 들어갈 순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들은 전투기 개발 과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점들이라, 충분한 시간과 자원이 들어가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부터 페론 정부에 의해 아르헨티나의 경기 침체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군에서는 노후화된 항공기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미국에서 F-86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제안했다.
당연히 돈이 없었던 아르헨티나는 불확실한 자국 전투기 개발에 시간과 돈을 들여 노후화된 항공기를 교체하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결국 F-86을 도입하게 된다. 그렇게 Pulqui II는 5대의 실험기만 만들어진 채 연구 개발이 중단되었다. 이후 1955년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자 Kurt Tank를 비롯한 그의 연구팀은 아르헨티나를 떠나 인도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곳에서 인도의 첫 제트 전투기 개발에 일조한다.
한편, Pulqui II가 양산에 들어가기도 전인 1954년 Horten의 주도 하에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Pulqui III도 개발 중이었다. Horten이 이끄는 팀은 제트 엔진을 장착한 기체를 제작하지 못해 앞서 다룬 두 명의 엔지니어에 비해 알려진 바가 많이 없다. 그러나 Horten은 독일에서 전익기를 연구하며 Ho 229를 제작한 뛰어난 엔지니어이다.
Horten이 이끄는 연구팀은 1952년부터 개발에 착수해 1954년 10월 1일 실제 크기의 모형 글라이더를 사용해 시험 비행을 하고 있었다. 1955년부터는 Rolls-Royce Derwent* 엔진을 장착한 시제기 제작이 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나중에는 두 개의 제트 엔진을 날개 아래에 장착한 I.Ae. 48이 구상될 정도로 순조로웠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쿠데타와 경기 침체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 1960년 비행을 1년 남긴 채 프로그램이 취소되고 만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Pulqui II와 비슷하게 F-86이 아르헨티나로 도입된 시점이 1960년 9월임을 고려할 때 F-86의 도입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I.Ae.37은 상당히 진보적인 디자인을 가진 기체였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Dassault Mirage III(1956)가, 스웨덴에서는 Saab 35 Draken(1955)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남미에서도 델타익 전투기가 나올 수 있었기에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특히, 지난 글에서 다루었듯이 스웨덴도 아르헨티나와 비슷하게 독일로부터 Ta-183과 후퇴익에 대한 기술을 기반으로 Saab 29 Tunnan을 개발하였다. 직선익을 시작으로 후퇴익 그리고 마지막에는 델타익으로 이어졌으며 엔진을 영국으로부터 받아온 점도 같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달리 스웨덴은 오늘날까지도 독자적으로 전투기를 개발하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 더 나아가 아르헨티나와 앙숙이자 아르헨티나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남아메리카의 패권국으로 떠오른 브라질에 자신들이 만든 전투기를 수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아르헨티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자국을 방문할 때 에어 포스 원과 속도를 맞춰 호위할 수 있는 기체도 없어 미 공군의 F-16이 대신 대동해야했을 정도로 공군력이 무너진 상황이다.
아르헨티나도 과거 프랑스의 Super Etendard와 Mirage III를 운영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포클랜드 전쟁 이후 악화된 영국과의 관계 때문에 제대로 된 후속 조치가 어려워지면서 비행이 중지되거나 퇴역한 상황이다. 이후 스웨덴으로부터 JAS39 Gripen을 도입하고자 했지만 기체에 영국의 BAe의 전자장비 들어가는 관계로 무산, 스페인으로부터 중고 Mirge F1 기체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 영국의 압력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밖에도 이스라엘을 통해 Kfir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 가격 문제와 영국의 압박으로 무산되었다. 우리나라의 FA-50도 2019년 아르헨티나의 차기 전투기로 선정되었으나 코로나 사태와 영국제 부품이 들어가는 관계로 무산되었다. 1980년대에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꺼내든 포클랜드 전쟁이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의 공군력 증강에 발목을 잡는 셈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르헨티나 공군이 운용하는 제트 전투기는 2020년를 기준으로 1950년대에 미국에서 들여온 A-4 Skyhawk 3대뿐이다. (6대라는 말도 있으나 제대로 운용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번에 코로나 경제 위기로 말미암아 나라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이제는 파키스탄의 JF-17을 고려중이라는 소식만 들린다.
참고로 JF-17은 우리나라의 T-50과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경량 전투기인데 중국이 설계하고 파키스탄이 조립하였다. F-16이 대당 4~5,000만 달러, T-50이 대당 2,000~2,500만 달러인데 반해 대당 1,500~2,000만 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보는 기체라 할 수 있다.
배경사진 출처 : Reddit
Wikipedia, FMA I.Ae. 27 Pulqui II
Wikipedia, FMA I.Ae. 33 Pulqui II
Wikipedia, FMA I.Ae. 37
Wikipedia, FMA I.Ae. 38
Wikipedia, Lockheed Martin A-4AR Fightinghawk
한국항공우주산업, 남도현의 항공 History <17편 : 대양을 건너가 이루어진 역사>
동고동락 "아르헨티나 미완의 제트 전투기, 풀퀴(Pulqui) 전투기 시리즈"
나우뉴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치킨으로 전투기도 살 수 있다.
* Derwent 엔진이 추력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바로 사용 가능한 엔진이었기 때문이다.
* 2021년 2월 2일 1차 수정 및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