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헬스장 다니는 회원들 모임이라면서 막걸리 파티에 불려 간 적이 있다. 안식구끼리야 돈독하지만 남편끼리는 영 데면데면한데도 덩달아 친한 척 굴면서 그래 봐야 두세 살 터울이 졌을 뿐인데 걸핏하면 상사 노릇, 형 노릇 하려 드는 아내 친구 남편(이하 '아친남')이 그날도 편협한 내 대인관계를 질타하며 참석을 강권한 것이다.
근처 빈대떡 가게에는 부부 두 쌍이 막걸리 잔을 두고 희희낙락 거리는 중이었다. 아친남은 예의 능글맞은 눈웃음을 지으며 쉼 없이 수다와 잔망을 작렬시키면서도 행여 대화의 주도권이라도 뺏길라치면 일생일대의 큰 봉변이나 당한 듯이 어쩔 줄 몰라하다 남 얘기에 감 놔라 대추 놔라 말참견을 마구 일삼으며 원상회복을 꾀했다. 그 꼴을 보자니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떠버리 아친남이 잠시 숨을 고르러 담배 태우러 나간 틈에 나는 탈출을 시도하려 했지만 초록은 동색이고 부창부수라고 그 아내가 또 여간이 아니어서 안타깝게도 엉덩이만 들썩이다가 만다.
그런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술자리에서 전혀 초면인 옆 아저씨의 존재는 무척 생경했다. 왜 있잖은가. 술값 계산할 때는 더치페이를 하지만 술판에서는 더부살이 눈칫밥 먹듯 옴츠리고 앉아 어색한 미소만으로 제 존재를 미미하게 증명할 뿐인 부류 말이다. 이런 자리 이골이 났다는 듯 무덤덤한 달관의 표정을 짓고 묻는 말에 한두 마디 겨우 답할 뿐인, 정숙의 미덕을 온몸으로 시현하는 듯한 몸가짐. 방향을 잃은 떠버리 아친남의 아밀라아제 유탄을 염려해 손바닥으로 막걸리 잔을 연신 가리는 외에 별다른 몸짓이라곤 거의 없는 절제의 소유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북새통 속에서 만난 느낌이랄까!
그런데 갑자기 그의 입가가 실룩거리다가 이내 봇물 터지듯 씨부렁대기 시작했다. 주책맞은 아친남을 응징하려는 건지 편향된 술판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고도로 계산된 극적 노림수인지는 막걸리 파티가 파하고도 한참이 지난 여태까지도 잘 모르겠다.
- 감천항에 가야 겨우 러시아인을 보던 시절에 러시아 뱃놈들한테 특히 인기를 끌던 선술집이 부둣가 근처에 있었어. 거기서 내 친구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 로스케 녀석이 되게 친한 척 굴더래. 친구란 녀석이 전작도 있었고 원래 반죽이 좋아서 말이 안 통하는데도 둘이 잘도 주거니 받거니 잔을 부딪치면서 웃고 떠들었다는 거야.
한참 그렇게 둘이서 잘 놀더니만 그만 사달이 났어. 갑자기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해댔던 거지. 어찌 됐냐고? 그길로 유치장에서 밤을 꼴딱 새웠지 뭐. 근데 좀 이상해서 그 친구한테 물었지. 말도 안 통하면서 싸울 건 뭐냐고. 그랬더니 글쎄,
'보드카 퍼마시고 나니까 말끝마다 개시키소시키하는 로스케 말이 귀에 착 감기더니 막 알아듣겠더라고. 이말 저말 막 주워섬기는 로스케 녀석 말을 들으니 영 눈꼴시러운 거야. 그래 내가 충고해줬지. 네 녀석 이념이 나랑 영 안 맞아. 그러니 생각 고쳐먹으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아 글쎄 녀석이 내 갈 길 가겠다는데 왜 지적질이냐는 거야. 이런 돼먹잖은 로스케 녀석, 홧김에 선빵 날리다가 그만.‘
아친남의 입이 봉해진 지는 오래됐다. 당연히 말문 터진 옆 아저씨를 막을 자 이후로 아무도 없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나는 거짓말 좀 보태 이명 탓에 그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절대고수는 역시 딴 데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