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을 암살하려는 형가의 시도가 좌절되자 진노한 진시황은 연나라를 보복 공격함은 물론 접경한 초나라도 공격하려 든다. 암살 주모자인 연나라 태자 단의 목을 가져온 이신에게 진시황은 초나라를 치려면 군사가 얼마면 되냐고 물었고 젊은 이신은 이십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했지만 늙은 왕전은 최소 육십만은 되어야 진격할 수 있다며 엄살을 떤다.
진시황 왈,
“왕 장군이 늙었구려, 그렇게 겁을 먹다니! 이 장군이 확실히 용감하니 그의 말이 맞다.”
자신만만하게 출격한 이신은 하지만 어이없게도 패배하고 크게 화가 난 진시황은 병을 핑계로 칩거한 왕전에게 친히 납시어 사과하며,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니 이신이 진나라의 군대를 욕보였소이다. 지금 듣자 하니 초나라의 군대가 하루하루 서쪽으로 압박해 들어오니 장군이 병중이긴 하지만 어찌 과인을 버릴 수 있겠소.”라고 했다.
왕전은 육십만이 아니면 전장에 나갈 수 없다 했고 진나라 군사란 군사 육십만을 싹싹 긁어모은 진시황은 출정을 종용한다. 대장군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이 왕전이란 늙은이가 진시황에게 요구한 게 뭔고 하니 좋은 땅과 집, 정원과 연못이라나. 기가 막힌 진시황이 떠나는 마당에 뭔 걱정이냐, 이기기만 하면 다 해줄께 했단다. 함곡관을 나가면서까지 이 노老장수는 다섯 번이나 진시황에게 사람을 보내 뱉은 말은 꼭 책임지라며 다짐을 받으려 했다.
이 영감탱이가 노망이 났나. 보다 못한 왕전의 부관이 한 마디 한다.
“채신머리없게 뭣 하는 짓입니꺼. 전쟁 이기면 어련히 알아서 해줄 낀데. 값 떨어지게시리.”
왕전은 그제야 속엣말을 푸는데,
“니는 그리 겪고도 모르겠니. 저 진왕은 성질이 사나울뿐더러 사람을 절대 안 믿어. 진나라 안 군사란 군사는 다 긁어모아 나한테 줬는데 만약 내가 딴 맘 묵고 진나라로 말머리를 돌리면 무혈입성이야. 걔 목숨은 내 칼에 달렸단 말이지. 의심이 안 들까 너라면? 땅이니 집이니 지한테 허접한 걸 자꾸 요구해서 나는 반역할 놈 아닙니다, 해야 걔대로 안심을 안 하겠냐? 야, 나도 오래 살고 싶거덩.”
다음 내용이 궁금하면 『사기열전』 「백기 왕전 열전」 읽어보면 알 테고, 지금으로부터 이천 삼백 년 전 인물의 처세가 현대를 사는 나보다 훨씬 엉큼하고 실팍해 부럽기 짝이 없다. 몇 수까지도 필요 없다. 단 한 수 앞을 내다볼 안목만 가졌대도 불가피한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영악하게 세상 살겠는데 그렇지 못하니 이 모양 이 꼴이다.
비록 글자로밖에는 접하지 못할지언정 신출귀몰하고 기상천외한 선인들의 처세술을 내 것으로 내면화하는 노력만은 게을리해선 안 된다. 알 수 없다. 살다 보면 기연가미연가하다가 어느새 사각의 링 위에서 작살나도록 얻어터지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