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란 녹이 슨 로보캅

by 김대일

Y 형 하면 자꾸 로보캅이 떠오른다. 이국적인 얼굴과 훤칠한 키, 그리스 조각상처럼 균형 잡힌 몸매는 선천적이려니와 체육학과 출신에 럭비까지 섭렵한 후천적인 단련으로 거의 금강불괴의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런 연상이 무리가 아닐 게다.

내가 대학 3학년이었으니까 형이 4학년 때 처음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흐트러짐을 목격한 적이 없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어떨 땐 보는 이를 질리게 만드는 사람. 대학 속 군대인 ROTC에서 선후배로 만나 훈육을 위해서든 먼저 사서 고생한 고참의 텃새든 간에 신참에게 보이는 위엄이 다른 선배라는 작자들에 비해 워낙 위압적이고 강렬해서 그 시절에 박힌 인상이 아마 무덤 속까지 따라올 태세다. 인두겁을 덮어써서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 뻣뻣하고 딱딱한 게 영락없는 기계라 인생살이도 덩달아 건조하기 짝이 없을 것 같으니 사는 낙이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안 해도 될 걱정까지 했다. 딱 1년 대학에서 실컷 부대낀 것 말고는 이후로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만나다 보니 선입견은 그대로 사실로 굳어지는 성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Y 형의 카톡 배경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너무 생게망게해서 혼났다. 지금도 애정이 식을 줄 모르는 첫사랑인 형수와 찍은 투 샷은 그렇다 쳐도 갓난아기를 가운데 두고 그보다는 조금 더 들어 보여도 어리기는 마찬가지인 여자애 둘이서 그 아기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가족사진만 전문적으로 찍는다는 사진관의 홍보 사진 같은 사진이 걸려 있었으니 말이다.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울끈불끈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헬스맨이나 격렬한 운동(럭비 같은 거)을 막 끝내고 땀범벅인 채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괜히 째려보는 에너제틱한 장면을 연출하는 스포츠맨 따위를 생각했다가 된통 당한 느낌이었다. 이런 거 올릴 형이 아닌데 사람이 변했나? 사람이 변하면 어찌 된다더라?

지금까지 내가 알던 형은 제 감정이나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는 헐거운 사람이 아니었다. 엄숙과 진지라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한 다음 이성에 기반을 둔 가치 판단으로 현상을 가늠하는, 그래서 친근함이랄지 오붓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카톡 배경 사진만 보면 그런 반전도 없다. 무엇이 형을 변모시켰을까? 호기심이 일어 무작정 형한테 연락했다. 뭐든 좋으니 형 얘기를 들려 달라고. 혹시 여태껏 형에 대해 착각한 게 있었다면 이 참에 고치겠다는 솔직한 심정을 밝히면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형이 보름쯤 지나 직접 썼다는 글을 메일로 보내왔다.

회 상 (回 想)

1. 첫사랑도 이루어진다

첫사랑은 대부분 파국이라지만 나는 첫사랑과 살고 있다. 아내는 초등학교 동기이자 교회 친구이며 내 첫사랑이다. 남자 중•고를 다니던 내가 자연스럽게 여학생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꿍꿍이로 교회를 다닌 건 절대 아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보니 주변이 꽃밭이란 걸 알았을 뿐이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지만 이성으로 좋아하기는 고2가 저물 무렵부터인 거 같다. 교회에 여자 동기가 여러 명 있었지만 지금의 내 아내가 내 눈엔 가장 예쁘고 착한 여학생으로밖엔 안 보여 혹시 모를 뭇 사내들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진즉에 찜을 해놓고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아내도 그런 내가 싫지 않았지만 교회를 핑계로 교제를 한다는 데 부담이 컸었다고 후일 털어놓았다. 그래서였는지 그때는 내 마음을 쉬 받아주질 못했다.

그렇게 1년 넘도록 외사랑이던 나는 지쳐 갔고 아내를 향한 마음도 어느새 접고 말았다. 안타까운 이별 이후 우리가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내가 대학 4학년이던 여름이었다. 아내는 과거의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는 듯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받아줬고 그런 아내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드디어 교제를 시작했다. 몇 개월 뒤 나는 졸업과 동시에 학군 장교로 입대를 했지만 아내는 2년 4개월이라는 긴 공백을 기다려줬다. 체육교사가 꿈이었던 나는 전역 직후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아내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참고 또 견뎠다. 임용시험 합격을 전제로 결혼을 약속한 그 해 양가 상견례는 내 의지가 적극 반영되었다. 그녀를 죽도록 사랑하지만 그런 그녀를 죽도록 고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시험에 합격했고 약속을 지켰다. 이듬해 5월 5일 마침내 첫사랑은 결실을 이루었다.



2. 향숙이는 진짜 이쁘다

2003년 우리나라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누적관객 526만 명으로 그 해 한국 영화 흥행 순위 2위인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영화에 출연한 송강호, 박해일 등은 한국영화를 개벽할 배우로 새롭게 주목받지만 그 배우들 이름보다 더 귀에 착착 감기는 다른 이름으로 나는 그 영화를 기억한다. 살짝 정신이 가출한 듯한 백광호(박노식 분)라는 살인 용의자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향숙이 이쁘다’는 영화가 히트하면서 같이 유명해졌고 유행까지 타게 된다. 영화가 개봉하던 해 개그콘서트에서는 영화를 패러디한 <걸인의 추억>이라는 코너가 등장해 영화 속 백광호를 흉내 내면서 매주 빠지는 일 없이 향숙이 이쁜 걸 홍보해댔다. 나야 초등학교 때부터 향숙이 이쁘단 걸 잘 알고 있는 터였지만 이렇게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주니 그저 황감할 따름이었다. 그렇다. 아내 이름은 향숙이다. 정작 본인은 제 이름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어쨌든 영화 덕에 이쁜 아내 둔 나만 희희낙락이었다. 샘이 많은 사람은 그러더군. 영화에서든 개그콘서트에서든 향숙이라는 인물이 등장한 적 없고 그녀를 본 사람도 없으니 미추를 알 길은 더더욱 없다고. 아니, 잘 안다. 향숙이를 매일매일 보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사반세기 가깝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봐도 단 한 번도 질린 적이 없는 그녀는 이쁘기도 하거니와 마음마저 곱디곱다. 그러니 ‘향숙이 이쁘다’는 진리다.



3. 네 명의 여자와 사는 남자는 행복하다


나는 네 명의 여자와 함께 산다. 한 명은 아내, 나머지 세 명의 여자는 딸들. 지수, 지우, 지호가 세 자매의 이름이다. 딸만 셋 낳을 줄 알았으면 우리 부부의 종교적 성향으로 미루어 보건대 믿음·소망·사랑으로 지었을지 모르겠다. 아쉬운 김에 내 핸드폰 주소록에다가는 첫째 믿음 지수, 둘째 소망 지우, 셋째 사랑 지호라고 이름 붙여 놨다. 아빠 유전인자 횡포가 심해서 생김새는 셋 다 아빠를 닮았다 안타깝게도.

첫째 지수는 우리 부부에게 난생처음 부모로 불릴 수 있게 해 준 딸이고 장녀답게 맏아들만큼 믿음직스럽다. 아빠처럼 되고 싶다는 녀석은 사학과에 진학해 열심히 교사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둘째 지우는 셋 중에 가장 영특하고 이쁘다고 언니와 동생이 인정한 똑순이다. 경영학을 전공한 대학 새내기인데도 역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금싸라기 같은 대학 첫 한 학기를 통으로 집에서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보냈다. 마지막으로 셋째 지호는 막내라서 마냥 사랑스럽다. 집에 웃음이 끊이지 않게 만드는 마술사 같은 마력을 지닌 귀염둥이 덕분에 집안은 늘 윤기가 돈다. 아빠의 부산 사투리와 억양을 따라하면서 놀려먹는 게 요즘 붙인 재미인 듯싶다.

아이들 얘기가 나오면 지인들이 가끔 물어본다. 아들 낳으려고 셋째까지 갔냐고. 절대 아니다! 지수와 지우를 낳고 나서 아들이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긴 했지만 막상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자 제발 딸이기를 바랐다. 먼 훗날 엄마와 아빠가 이 세상을 뜨고 나면 의좋은 세 자매끼리 서로를 아껴 주면서 사는 장면이 더 훈훈해 보기 좋다. 심성 고운 엄마를 닮았으니 꼭 그리 될 게다. 아들 가진 사람들은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딸 셋 둔 아비의 자부심은 아들 셋 둔 아비가 느끼는 그 이상이다. 살면서 아쉬운 단 한 가지는, 목욕탕엘 가면 나만 빼고 모든 식구들이 반대 방향으로 들어갈 때다. 불가항력임을 알지만 매번 적적하고 서운한 걸 어쩌지 못한다.

지호를 낳은 뒤 나발로 병원을 가 아예 묶어 버렸다. 결혼하자마자 첫째가 들어서는 바람에 줄곧 임신과 양육에만 매달려 온 아내한테 너무 미안해서였다. 또 아기를 너무 좋아하는 아내와 내가 무심결에 넷째를 안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에 결단을 재촉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제 앞가림할 정도로 컸을 어느 날 아내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지 그치?”



4. 체육교사 & 직업군인


내 꿈은 두 가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선수로 뛰는 등 운동을 좋아하던 나는 중학교 때는 체육교사가 되고 싶었다. 늠름한 제복의 매력에 빠진 고등학교 때는 군인(장교)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학을 물색할 무렵에 육군사관학교 지원을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영어 울렁증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군인(장교)이 되고 싶은 꿈이 사그라지나 싶었는데 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진학하고 그 대학교 ROTC에 지원하면서 교사와 장교의 꿈을 동시에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 금상첨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학 4년 간 체육 교사 지망 교육학도이자 사관후보생으로 학업과 운동, 그리고 군사훈련을 병행하며 다른 누구보다 바쁜 학교생활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중등 체육교사 정교사 자격(2급)과 다이아몬드 계급장(소위)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자대를 배치받고 1년은 소대장으로, 나머지 1년은 대대 참모(작전장교)로 활약했다. 그렇게 복무기간을 꽉 채워 갈 즈음 선택의 기로에 서서 잠깐 고민을 했었다. 이대로 군에 남아 본격적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전역 후 임용을 준비해 체육교사가 될 것인지. 당시 복무하던 병과(방공 보병)로는 ROTC 출신인 내가 비집고 들어갈 미래가 그리 밝지 않았다. 이왕 직업으로서 군인이 될 거면 목표를 원대하게 가질 필요가 있는데 그러자니 내 앞에 깔린 멍석은 좁기만 하고 그리 편하지도 않았다. 아쉽지만 결국 전역을 결정했다. 전역 후 3~4개월 동안을 불길이 치솟듯 맹렬하게 공부했고 운 좋게 임용시험에 합격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24년째 이어가고 있다. 세월 참 빠르다.



5. 교사 초임 발령


1997. 3. 1. 경기도 아무개 시의 한 고등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마침 학교도 1학년 4 학급, 140여 명으로 그 해 개교를 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달랑 2층으로 된 교사(校舍) 한 채와 운동장, 그 운동장을 둘러싼 울타리만 있을 뿐 모든 게 태부족이었다. 입학식 당일 신입생들을 맞이할 때, 운동장 울타리 안쪽으로 학부모들(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당연히 학부모라고 생각했는데)과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길래 행사를 곧 시작할 테니 입학생들은 중앙 조회대 앞으로 모여 달라고 했더니 학부모들까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모이는 게 아닌가. 자세히 봤더니 학부모라고 착각한 이들은 담배를 꼬나문 입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왠지 앞으로의 교직 생활이 평탄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시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그 도시는 학교 간 학력차가 심해서 신설 학교로 지원하는 학생들의 성적이 썩 좋지 않을뿐더러 다소 거친 생활 습관을 가진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남자 체육교사는 학교에서 악역을 전문적으로 맡아야 할 숙명을 타고났다. 어쩔 수 없이 미친개처럼 학생 지도에 열을 올려야 했고 당연하게도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신임 교사의 학생 지도라고 둘러대겠지만 돌이켜보매 혹시 ‘훈육을 가장한 폭력’에 무감각했던 건 아닌지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사 생활을 이어가면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보고 싶은 제자들을 꼽으라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때 그 녀석들을 떠올린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을지언정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의리만큼은 녀석들이 단연 최고였으니까. ‘우리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던 그때 그 녀석들이 보고 싶다.

학교의 명성을 논하는 게 마치 내 교직 생활을 송두리째 평가하는 듯이 여겨져 나를 더 엄격하게 다그쳤지만 사제의 끈끈한 정마저 엄격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보고 배우면서 내 교직생활도 영글었던 것이다. 내가 퇴직하는 그날까지는 그 학교의 연혁과 내 교직 기간은 같이 갈 것이다. 신임 교사한테 신설 학교의 만남은 그렇게 운명 같았다.



6. 미친개? 아니 테리우스!


비평준화 신설 학교의 핸디캡을 극복해 보고자 학교에서는 다양한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그 일환으로 TV 예능프로그램을 섭외해 학교를 소개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특히 <기쁜 우리 토요일 - 영파워 가슴을 열어라!>라는 프로그램은 제법 유명짜했다. 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크게 외치는 포맷이었고 당시 프로그램 MC가 홍록기, 게스트로 OPPA라는 그룹도 왔었다. 프로그램 녹화가 있던 날, TV 촬영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는지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몰려들었고 혹시 모를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나는 질서 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급하게 찾는 소리가 나 뛰어 가봤더니 한 여학생이 옥상에서 나를 두고 소리를 치고 있지 않은가. 테리우스 선생님 사랑해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이다.

이후로 내 별명은 테리우스가 되었고 방송의 힘은 대단히 위력적이어서 다음 해, 그다음 해 입학한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연신 나는 ‘테리우스’였다. 민망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기 그지없는 별명이다. 학교에서 학생들 생활지도를 맡은 학생부장이나 학생부 선생님들의 별명엔 여지없이 ‘미친’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마련이었다. ‘미친개’, ‘미친놈’, 혹은 ‘미치다’란 단어에서 파생된 ‘또라이’, ‘망나니’, ‘개차반’ 따위 말이다. 선생님들 입장에서야 억울한 면이 없지 않겠지만 지도받는 학생들의 억하심정을 감안한다면 아주 이해를 못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미친개’ 소리 들으면 섭섭하기가 이를 데 없는데 그에 비해 나는 《들장미 소녀 캔디》에 나오는 미남자 ‘테리우스’라는 게 어찌나 감사한지.

그 뒤로 다른 학교로 적을 옮겼지만 별명은 여전히 유효해서 십여 년 넘게 불리다가 마흔이 넘어가고 다른 지역으로 전근하면서 그 별명은 어느덧 사라졌다. 지금 있는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테리우스의 전설을 말할라치면 아무도 믿으려 들지를 않는다. 아, 세월이 야속하더라!



7. 술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댔다. 어렸을 때부터 술과 담배를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굳건했지만 대학이란 곳에 입학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술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다. 어영부영 마시게 된 술에 반해 담배만은 끝까지 사양했고 반백 살이 된 지금까지도 고수 중이다. 어른 앞에서 술을 배워야 한다는 고지식한 생각에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생애 첫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고 럭비부와 학군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량은 점차 늘어갔다.

자대 배치를 받고 중대 첫 회식에서 소대 선임하사와 나눠 마시라고 중대장이 화이바(헬멧)에 따라 주는 소주 두 병을 객기로 혼자 다 마셔 버렸고, 초임 교사 시절 교직원 회식 때마다 한창때 자기는 늘 그렇게 마셨다면서 교장 선생님이 글라스에 꾹꾹 담아 주던 소주를 넙죽넙죽 잘도 마셨다. 체력 좋던 젊은 선생 시절에는 술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한테 술잔을 돌려야 직성이 풀렸고, 위계를 지켜야 한다며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윗사람이 남아 있으면 절대 먼저 뜨는 법 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 참석하는 술자리는 밤늦게 끝나는 법이 없고 항상 일찍 끝났다. 새벽 일찍. 그렇다고 술에 못 이겨 정신을 잃거나 주사를 부린 적도 없다. 필름 한 번 끊긴 적 없이 집엘 잘도 찾아 들어갔으니까 술 체력 하나는 끝내줬던 셈이다.

그렇게 술에 취해 살던 30대 중반쯤,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이후로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덩달아 술도 끊었다. 남편이 술을 끊고 교회에 충실하길 바라는 게 아내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었으니 내가 술을 끊은 것은 결과적으로 아내 기도에 부응한 것이리라. 내가 술을 끊자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당연하지만 아내였다. 금주를 선언할 즈음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전 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 선생님들은 내가 술을 끊었다고 하자 전혀 믿지를 않았고 새로 옮긴 학교에서는 한때 밑 빠진 술독이었다고 하면 또한 전혀 믿지를 않았다. 그렇게 단숨에 술을 끊었다. 하긴 술 앞에서 그토록 기세 등등하던 내가 난생처음 필름이라는 게 끊기고 몸 부대끼는 감을 슬슬 느껴지던 무렵이었으니 금주를 미적댔다가 무슨 낭패를 당했을지 또 모를 일이었다.

술을 끊자 만나는 사람도 바뀌더라. 술친구로 만나던 사람들과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사뭇 도덕적이면서 모범적인 인간관계로 물갈이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세상은 공평해서 좋은 게 있으면 그 맞은편에는 궂은 게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새로운 관계가 안 괜찮다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친분을 이어가던 이들과 서서히 멀어지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러 40대 중반에 이르렀더니 불현듯 사람이 자꾸 그리워지고 외로움에 버둥거렸다. 주위에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꼭 술을 끼워 넣어야만 대인관계가 원활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잔을 치고 옛 추억을 안주 삼아 곱씹을라치면 술만 한 것도 사실 없다. 근래 나는 십여 년 넘게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면서 옛 인연을 찾아 격조했던 지난날을 만회하려고 노력 중이다. 오랫동안 끊었다가 다시 마시만 혹시 삐걱대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다. 금주하면서 갈고닦은 술 체력이 소싯적 못지않다. 아내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소리지만.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내는 걱정이 많다.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부인, 너무 염려 마시게. 예전같이 술독에 빠져 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그저 우리 젊은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그리운 이들을 만나 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할 북돋음용 곡차 정도로만 여길 테니까. 대신 지금도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다니겠습니다.



전반생을 잘 요약했다. 카톡 배경 사진에 담긴 의미를 글로 잘 표현했다. 형한테 이런 재주가 다 있었다니 신통방통했다. 더불어 그리움, 외로움 같은 감정에 겨워하는 여린 형도 발견했다. 나이가 들면 로보캅도 마음에 스는 녹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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