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 다시 만날 예정이다. 사회복지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처음 발령받은 ○○구 ○○동사무소를 찾아가 축하인사 겸 점심 식사를 함께했던 게 2020년 3월이었다. 공교롭게도 녀석의 발령지는 내가 2019년에 같은 구 일자리센터에 기간제 직업상담사로 채용돼 처음으로 근무했던 동사무소이기도 해서 인연이 더욱 각별하다. 마치 친정같은 내 첫 근무지가 김의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시작을 알리는 첫 발령지라는 점에서 둘만의 술자리 안줏거리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녀석하고는 대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1991년 당시, 신입생 60명 중 남자만 13명이나 들어와 국어국문학과는 모처럼 수컷들의 고린내로 진동을 했다. 그걸 또 대단한 자부심인 양 우쭐대면서 오묘한 낮술의 세계에 흠뻑 빠진 철딱서니 쌈 싸 드신 무리에는 당연하게도 김과 내가 끼어 있었다. 술기운에 기대어 이완의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는 한 김은 숫기가 없고 무던했으며 순박하기까지 했다. 과장해 비유하자면 곰과 소가 흘레붙어 낳은 새끼가 딱 그 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 불찰로 인해 행여 남의 심사가 이그러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해도 남의 불찰로 제 심사가 불편해질 장면에서는 살다 보면 실수할 수가 있지만 조심할 필요도 있다며 애써 점잖게 타이르고 만다. 그가 군대 가려고 이 학년 이 학기에 휴학하기 전까지 죽 어울려 다녔지만 주독으로 얼굴 붉어진 건 봤어도 배알 꼴려 성질부리는 추태는 본 적이 없다. 독종하고는 거리가 먼 천성에다 남을 먼저 배려하려다 정작 제 잇속은 제대로 못 챙기는 습성이 지나쳐서인지 졸업 후 사회생활이 썩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여기! 하고 안착하지 못한 채 여러 직업을 전전하더니 한동안 소식이 두절된 적도 있었다.
교육대학원을 나와 기간제 국어교사가 되고 한참 후에야 동기모임에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구태여 꺼내지 않았을 뿐이지 안 겪어본 사람은 그 심정을 절대 모른다는 그의 ‘대학원 고군분투기‘를 둘만의 술자리에서 김이 우연히 실토했을 때 나는 마침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2017)이란 책을 읽는 중이었다. 신산했던 대학원 생활을 억척스럽게 견뎌 낸 김이 예전에 내가 알던 순둥이가 아니어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우면서도 친구랍시고 힘이 되어 주지 못한 무력감과 미안함이 더 커 착잡했었다. 술자리를 파한, 그날따라 더 침침한 어둠이 세상을 짓누르던 어느 여름밤에 “다 잘 될 거니까 괜찮아!”라고 취기로 달뜬 녀석의 작별 인사에다 대고 "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Si vales bene valeo)”라고 읊조리던 나는 그길로 짧은 글을 남겼다. (김대일, 『일상』, 새로운사람들, 2020, 52~53쪽 )
아무개 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삼 년째 근무하던 중에 기간제 딱지를 떼어 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었다. 학교는 정년퇴직 교사를 이을 국어과 정규직 자리를 내부에서 발탁하기로 가닥을 잡았고 고과 성적과 평판이 고루 무난한 김이 물망에 올랐다. 특히 김의 고교 시절 은사였다는 학교 교장은 김이 처음 그 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재직 내내 사기 앙양 차원에서인지 제자이자 후배 교사인 김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의 표현인지 분간이 안 되는 행태로 그에게 무수한 떡밥을 연신 던졌고 덕분에 월척이 미끼를 덥석 물 듯 신분 전환의 김칫국을 원 없이 들이켜고 만 김이었다.
인사이동이 마무리된 뒤 김을 따로 부른 교장은 자기와 돈독하게 지내는 다른 중학교 교장한테 김을 소개할 테니 거기서 근무하며 정규직 기회를 재차 노려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정규직 채용 건에 미역국 제대로 먹은 데다 다음 해 예정된 인원 감축 계획으로 김의 자리가 불투명한 마당에 교장은 제자이자 동료 교사의 궁색한 밥벌이를 끝까지 신경 써주는 지극 정성을 연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건강이 안 좋아 당분간 몸을 추스르고 싶다고 에둘러대며 김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얼마 후 만났을 때 김은 얼굴 살이 쏙 빠졌다. 안주하지 못하는 기간제 교사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지만 그마저도 나잇살 더 먹게 되면 불러줄 학교도 더는 없을 거라며 구시렁거렸다. 그런 그가 몹시 지쳐 보였다. 더 늦기 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품에서 암중모색이 엿보여 우짤낀데 취조하듯 따지자 입을 꾹 닫아걸었다. 말해 주지 않는 녀석이 고까웠지만 무얼 하든지 쥐구멍에 볕이 들 때가 됐다고 응원했다. 아무튼 녀석은 다시 곰이 되고 소가 되었다.
이후 한동안 김은 다시 깊은 잠수를 탔다. 사회복지사 자격 공부를 한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으나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니 불확실했고 무엇보다 김과 사회복지사가 선뜻 잘 어울리지 않아 의심스러웠다. 2019년이 거의 저물어가던 겨울, 연락이 닿는 동기들끼리 밥이나 같이 먹자며 김이 먼저 연락을 해 왔다. 밥, 술 먹자는 핑계로 주로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김은 그럴 만한 주변머리가 없다. 하여 살짝 당황했다가 이내 좋은 낌새를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회복지공무원 임용 시험에 합격을 해서 한턱 쏘겠다는 뜻밖의 희소식을 함께 전한 것이다.
김은 반지빠른 녀석이 아니다. 그러니 자진해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간혹 먼저 연락이 올 때는 모임의 총무 겸 연락책으로 참석 여부를 확인하려는 의무를 다하려는 것뿐이다. 허나 올해 들어서는 확실히 전세가 역전됐다. 이번 저녁 약속도 김이 먼저 연락을 해 제안을 한 거니까. 좀 늦었지만 생애 첫 저서를 출간한 작가 친구를 위해 축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선심이 기특하고 고맙다. 이번에 만나면 염치 불고하고 산해진미로다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달라고 떼를 쓸 작정이다. 좀 과하다 싶을 만치 빈대 붙어도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너끈히 커버를 할 김이라서 괜찮다.
김에게 바라는 게 있다. 공무원의 길로 이왕 접어들었으니 제 직분에 성심성의껏 임해 선량한 시민의 공복이 되어 주길 기대하는 건 당연하고, 부평초같이 안주하지 못해 애면글면하던 지난 세월일랑 확 일소해 버리고 이제부터는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누리고 사는 즐겁고 행복한 인생 2막이 열리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곰과 소가 흘레붙어 나온 새끼가 커서 여우 새끼로 살더라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