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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an 16. 2024

내한테 친구는 니밖에 없는 거 알제?

   지난주 월요일 서울 사는 박가가 별안간 기별을 넣어 오랜만에 회포 풀 준비하고 있으랬다. 중3짜리 외동아들이 친구들과 3박4일 일정으로 부산 해운대로 갈 텐데 어른이 인솔을 해야 한대서 자기로 낙착을 봤다나 어쨌다나. 생략한 속사정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부산하고도 해운대에서 오래 산 박가 전력이 적임자로 뽑히는 데 크게 작용했음이리라. 금요일부터 월요일 일정 중에 평일이 이틀씩이나 끼어 있는데도 용케 짬이 나는가 보다. 하기사 투신사 임원쯤 되면 그 정도 요령은 부려봄 직하다. 깎새로서는 다음날이 휴무일인 월요일이 해후하는 날로 딱이지만 박가 형편은 또 아니라서 금~일 중 괜찮은 날로 추후 정하기로 했다.

   박가와는 대학교 3학년 ROTC 후보생으로 처음 만났다. 죽이 잘 맞아 후보생 시절 잘 어울려 다녔다. 임관 후 배치받은 부대도 강원도 원통에서 윗동네, 아랫동네여서 얼굴은 안 잊어 버렸다. 전역 후 사회생활 역시 같은 보험회사에서 시작했다. 깎새는 서울 본사로, 박가는 부산 지점으로 흩어지긴 했지만. 그 뒤 박가 행보는 입신양명을 위한 치열한 투쟁 그 자체였다. 보험 설계사 뒤치다꺼리나 하는 영업소장으로는 살고 싶지 않았는지 증권 관련 자격증을 수두룩하게 따 이력서를 꽉꽉 채운 뒤 증권사 인사팀으로 적을 옮겼다. 인사팀에서 조직 관리나 할 줄 알았던 박가는 어느새 한 투신사 증권전문가로 탈바꿈했고 그 바닥에서는 제법 유명짜하게 이름을 날려 지금에 이르렀다.

   후보생 시절부터 품은 꿈이 야무졌던 박가였다. 불알친구가 아니어서 굴곡진 유년기를 듣긴 했어도 체감할 순 없었다. 다만 조각상처럼 멀끔한 면상하며 세련되고 고급지게 자기를 드러내고픈 약간의 허영심은 털털한 성미와는 매우 이질적이면서 의도적 연출일 공산이 크다는 심증을 굳힌 깎새였다. 남한테 무시당하는 게 죽기보다 싫고 끝없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의 종착은 돈, 돈을 향한 엄청난 집착이었다. 언젠가 '남한테 안 꿀리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던 포부에 서린 응어리는 돈을 만지는 금융맨에게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돈의 천착과는 결이 다른 비장함이었다. 그 비장함이 도가 지나쳐 그를 아는 사람 사이에서는 박가가 돈으로 친구까지 저울질하는 이기적이고 저급한 인간이란 평판이 자자했고, 뒤웅박 팔자로 전락해 전전긍긍하던 시절 안 그래도 주눅들어 있는데 그 속도 모르고 실없이 군 박가가 서운하기 짝이 없었던 깎새도 한동안 고까웠던 게 사실이었다.  

   허나 승승장구하는 박가도 외로운 인간이긴 마찬가지다. 다음날이면 후회할 게 뻔한 술주정을 깎새한테 해대는 박가가 언제부터인가 불쌍해 보였다. 수화기 너머로 "내한테 친구는 니밖에 없는 거 알제?" 혀 꼬부라져 앵무새 되뇌듯 지껄이는 주사를 듣고 있노라면 해장국만이 술독을 풀어주는 건 아니라고 염려했다. 견실함이란 가면을 뒤집어 쓴 외톨이가 위태롭게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기약 없을 성싶던 재회가 현실로 다가오니 설렜다. 하지만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이 지나도 기별은 다시 없었다. 지난주 점방 손님 치르느라 한창 바쁠 때 통화를 한 탓에 혹시 '다음주' 내려온다는 소리를 '이번주'로 착각해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다음주'가 되는 이번주까지 박가 연락을 기다려 볼 작정이지만 기대감은 별로 없다. 가족 여행이라면 모를까 제 아들까지 포함해 총 9명이나 되는 중3짜리 대부대를 이끌고 부산까지 내려오는 게 사단 유격대장 출신인 박가한테도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닐 터이니. 그럴싸한 구실만 마련한다면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인솔자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전형적인 대한민국 남자의 수작이다. 

   한동안 뜸하다가 또 별안간 기별을 넣어 알딸딸한 목소리로 그때 왜 못 갔는지 변명을 늘어놓을 게 뻔한 박가라 어련하시겠냐고 퉁바리를 날리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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