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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02. 2024

기술자의 경지

   고급염색은 일반염색보다 작업시간이 절반으로 준다. 일반이 바르고 20분 뒤 행군다면 고급은 10분 안에 모든 게 끝난다. 만약 지체하면 염색이 말라 행구기 불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피 염증을 유발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개업하고 얼마 안 됐으니까 신출내기 내가 폴폴 풍길 때였다. 그날따라 손님으로 제법 성시를 이뤘다. 한 손님이 처음엔 일반을 주문했다가 갑자기 고급으로 바꿨다. 요금이 두 배니 염색볼에 이미 일반염색약을 부었다고 해서 마다할 깎새가 아니었다. 고급약으로 새로 바꿔 정성스럽게 도포하고 있는 중에 수북하게 자란 장발을 한 손님이 점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꼴로 봐서는 서너 달 뭉그적거리다 주변에서 제발 단정하게 살자고 채근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깎새를 찾았으니 바짝 올려 깎는 스포츠형을 주문할 공산이 컸다. 예상은 적중했고 그때부터 마음만 급해졌다. 10분 뒤 고급염색 손님 머리를 행궈야 하는데 그 안에 장발을 걷어낼지 가늠이 안 됐던 게다. 머리를 깎고 나서 염색 머리를 행굴 것인지 커트 손님을 10분 간 대기시킬 것인지 그것이 난제였다. 결국 커트 손님을 이발의자에 앉히고 커트보를 두른 후 급하게 바리캉을 놀렸다. 머릿속은 10분 내 커트를 마치자마자 곧장 세면대로 돌진할 일념뿐이었고.

   마음이 급하니 몸도 따라 경황이 없었으리라. 아무튼 10분 안에 커트를 마치고 고급염색 손님 머리까지 얼른 행궜다. 지체없고 차질없이 끝냈다는 안도감은 손속 빠르고 야무진 꾼에 제법 견줄 만하다는 자뻑으로 변질됐다. 하지만 볼일을 다 마친 염색 손님이 요금을 지불하고 나가면서 퉁바리를 놨다. 경종이었다.

   "주인양반, 뭐가 그리 급해요? 머리 깎는 걸 뒤에서 보니 정신이 다 없습디다. 그래 가지고서야 손님이 불안해서 제 머리 맡기겠소?"

   엊그제 등산복 차림을 한 부부가 점방을 찾았다. 남편은 아내 머리는 새치염색, 자기는 컬러염색을 하고 싶다면서 요금을 물었다. 여자 머리는 남자보다 염색약이 많이 들고 품도 많이 가 요금을 더 받아야겠으니 고급염색 요금에 5천 원만 더 얹어 달라고 했다. 대신 염색약을 직접 들고 온 남자 컬러염색은 일반염색에 준하는 품값만 받겠다고 제안했더니 의외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에 비해 숱이 엄청난 여자 머리 염색 작업은 무척 더뎠다. 더군다나 고급염색약이라 시간 간수까지 잘 해야 했다. 헌데 참 이상도 하지. 치렁치렁한 여자 머리, 그것도 두피 부근 새치만 골라서 염색을 해야 하는 고단한 뿌리염색인데도, 머리가 허옇게 센 남편 머리를 핑크빛 도는 컬러로 물들이겠다고 두피 마사지하듯 머리통 전부를 문지르는 수고까지 더하는데도 전혀 거리끼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는 느긋함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게다가 실없는 농담까지 슬쩍슬쩍 던지며 어색한 분위기를 눅이는 여유는 또 무엇이며.

   불과 2년 전, 꼭 엉덩이에 불 붙은 망아지마냥 달망거리는 꼴불견은 온데간데없다. 거침은 없고 순조롭기가 마치 물이 흐르듯 한다. '시간이 약'이기에 가능한 조화일까 도道가 스며든 술術의 분발일까.

   포정이 왕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그 동작이 최고의 춤을 추듯, 최고의 음악을 연주하듯 자연스러워 그에 탄복한 왕은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냐고 물었다. 이에 포정은,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신영복, 『강의』, 돌베개, 324쪽)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커트를 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눈 앞의 손님 머리통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손님 머리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손님 머리통을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이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전보다 자란 머리카락 만큼만 싹둑 잘라내고 손님이 늘 고수하는 스타일에 맞게 바리캉을 놀립니다. 손님 머리통을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왜 이 모양으로 깎았냐고 항의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머리 스타일 유행이 급변했다고 문제겠습니까." 

   '포정해우庖丁解牛', 기술자의 길로 들어선 깎새가 끝없이 동경하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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