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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17. 2024

여자 안 그립습니까

   밥을 만 양은냄비 바닥을 벅벅 긁고 있는데 불쑥 들어온 손님은 바람이 난 아내와는 애저녁에 헤어지고 외동아들까지 작년 정월에 장가를 보낸 단골이었다. 식사 시간 방해하는 불청객이 따로없다며 미안해하는 그를 얼른 이발의자에 앉히고 커트보를 둘렀다.

   "혼자 사니 아침 겸 점심, 점심 겸 저녁 두 끼로 충분해요."

   너무 솔직해서 궁상스러웠다.

   단골은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전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깎새 점방까지 걸어올려고 하니 여름은 말할 것도 없고 시린 겨울에도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머리 깎는 게 여간한 큰일이 아니라고 눙치자 덕분에 바깥바람 쐬고 좋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다. 호빵맨을 닮은 선한 얼굴이 웃으면 그걸 본 옆사람이 덩달아 너그러워긴 하지만 그 웃음을 송두리째 소거시켜 버리는 그늘은 어딜 가지 않아 안타까움으로 변질되곤 한다. 버림받았다는 배신감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아들이 군생활할 무렵 개인택시를 몰다가 귀가를 하면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잦았다. ​친구와 찜질방에서 자고 왔다는 둥 울릉도로 여행을 느닷없이 떠났다는 둥 돼먹잖은 핑계를 댔지만 진작에 낌새를 챘다. 한번은 등산 다녀온 여자 몸에서 모텔 냄새가 짙게 났다. 등산객을 실어나르는 관광버스 기사가 내연남이었고 인근에 사는 아는 사람이었다. 여자가 먼저 이혼장을 들이밀었다. 군대 간 아들은 안중에도 없냐면서 제대하면 그 녀석 의사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달랬다. 덧정없었지만 아들이 참고 살라고 하면 그러겠노라 마음까지 먹었더랬다. 헌데 전후사정을 다 들어본 아들은 선뜻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했고 그길로 깨끗하게 갈라섰다.

   이혼 서류에 도장 찍으면 끝날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불쑥 치미는 울화로 미칠 것만 같아서 밤낮없이 술에 절어 살았다. 그 여파인지 오른쪽으로 풍이 와 운전을 못 할 지경에 이르러 택시를 관뒀다.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으로 겨우 연명하지만 혼자 사는 데는 제법 익숙해졌다. 하루 두 끼만 먹어도 배부르고 이쁘장한 여자 트롯 가수들이 펼치는 경연프로를 틀어놓고 흥얼대면서 소일하는 일상도 맞갖다. 가끔 독수리오형제인 양 어울리는 친구들과 철따라 떠나는 여행은 덤으로 즐겁다.

   "여자가 안 그립습니까?"

   무심코 튀어나온 질문이 겨우 아문 상처를 건드린 성싶어 우두망찰하던 깎새가 상황을 모면해보겠다고 다시 던진 말이 또 가관이다.

   "배우자 말고 여자친구 말입니다."

   "사낸데 살 섞고 싶은 욕망이 왜 없겠어요. 헌데 다리 저는 병신 노땅 좋아해줄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돈 주고 사면 몰라도."

   이왕 터진 입이라는 듯 거푸 푸념이 이어지자 괜한 짓을 해 분위기만 숙숙해졌다고 후회막심해하는 깎새.

   "나보다 낫다고 딴놈한테 가랑이 벌렸으면 그놈이랑 잘 살아야지 헤어지긴 왜 헤어져. 허랑방탕하다고 동네에서 소문 자자했던 사내를 무에 그리 좋아서."

   ​성치 못한 몸이니 늙어갈수록 서럽기만 할 뿐이고 저쪽도 남자와 갈라선 뒤 독수공방이니 이참에 다시 합치는 게 어떻겠냐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주변에서 넌지시 등 떠밀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단다.

   "딴 남자 밑에 누워 교태 떠는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데 댁이면 또 같이 살겠수? 그것보다, 처음 배반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두 번 세 번은 일도 아닐 게요. 아서라."

   손님이 휘두르는 요설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엔간해서는 논평을 자제한다는 철칙을 깨고 깎새가 추임새를 넣어 버리고 만다.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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