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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19. 2024

어떤 산책

   주례 어느 지점에서 서면 어느 지점까지 대로를 따라 걸으면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다. 그 거리를 매일 걷는다는 중년이 머리 깎으러 깎새 점방엘 처음 들렀다. 뱃살 빼려고 걷기 시작했다는데 하고많은 경로 중에 왜 하필 주례-서면 구간이냐고 물었더니 우선 집이 주례 아무개아파트라 그렇고 큰 도로가 주는 편의성이 마음에 들어서라나. 이를테면 걷다가 용변이 급하면 눈치 볼 것 없이 가까운 전철역 화장실로 달려가면 그만이고 걷다가 다리가 아프다거나 걷는 게 지겨워지면 가까운 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집에 가기 수월하니까. 산을 타거나 잘 조성된 둘레길을 걸어서 얻는 이득, 맑은 공기를 쐬고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에 기대 사색을 즐기는 따위가 나쁘지는 않겠으나 채비해 거기까지 가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더 커 단념했다고 덧붙였다. 

   돌연 궁금해져서 물었다. 깎새 점방은 대로에서 제법 떨어진 지선도로에 면해 있어 평소 다니는 경로에서 벗어났는데 어인 연유로 깎새 점방엘 찾았는지.

   "지루해서. 똑같은 데만 걸으니까 심심하던 차에 살짝 빠졌는데 마침 점방을 봤고 또 마침 이발할 때도 됐고 해서 들어온 게요."

   대답이 싱거워서 오히려 신박했다. 가만, 맥락이 비슷한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고故 타나구치 지로와 쿠스미 마사유키 콤비가 공동작업한 다른 만화로 『우연한 산보』가 있는데,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따뜻한 일상 풍경을 담아내는 미덕을 가진 작품이다. 원작자인 쿠스미 마사유키는 스토리 취재를 위해 실제 도쿄 여러 곳을 걸어봤다고 한다. 그가 밝힌 원작 뒷이야기가 인상깊었다. 일종의 취재 규칙이었는데 그 첫째는, 조사하지 않는다. '관광 가이드'나 '동네 산책 매뉴얼' 따위, 책이나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고 나가지 않는다. 둘째, 옆길로 샌다. 사전에 지도를 보고 간다고 해도 걷기 시작하면 그때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쪽을 향해 적극적으로 샛길로 샌다. 셋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시간 제한을 두지 않고, 그날 안에 정하려고 하지 말고 느긋하게 걷는다. 의미없이 걷는 산책의 즐거움을 작가는 만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왕 의심스러운 김에 주책없이 또 참견했다. 대낮에 이리 느긋하게 소일하는 걸 보면 자영업하시는 분이 틀림없다고.

   "얼마 전에 회사 관뒀어요. 하는 짓거리가 하도 앵꼬워서 내 발로 나왔시다."

   불입금을 적게 내는 바람에 월 일백만 원 정도밖에 안 나오는 국민연금 받고 사는 백수라고 비하하는 남자가 딱해진 깎새가 위하는 척 묻는다.

   "너무 적지 않나요?"

   "마누라가 직장생활해요. 원래 예순 정년인데 회사가 사 년째 연장을 시켜 부려먹어. 수완이 좋아서겠지. 호적이 늦어 실제로는 예순일곱인데도 끄덕없나 봐 ."

   뱃살 뺀다는 구실로 시간 죽이려고 산책을 택했을지 모른다. 그게 맞는다면 착잡함을 은닉하려는 술책에 다름 아닌 산책이다. 볼일 다 보고 점방 문을 나서려는 중년의 뒷모습에다 대고 깎새는 호의랍시고 여운을 남겼다.

   "산책하시다가 목 마르면 들러주이소. 물값은 안 받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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