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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24. 2024

문자 해고 통보

   달포 전쯤 깎새가 4수 만에 겨우 이용사 자격증을 딸 무렵 정성껏 거들어 줬던 이용학원 이 실장이 점방엘 찾아왔다. 깎새한테 학원 강사로 근무했었다는 확인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깎새가 한때 적을 뒀던 이용학원은 최근에 임자가 바뀌었다. 방만하게 운영하다 형편이 쪼그라들게 된 원장이 손 털고 나가면서 직원이었던 이 실장을 카톡 문자로 해고 통보했다. 수족처럼 부리던 직원의 고용승계는커녕 일 년 가까이 밀린 급여와 퇴직금조차 정산하지 않고 내뺀 것이다.

   학원을 매물로 내놓을 때부터 실장은 급여와 퇴직금 정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원장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실장이 급여와 퇴직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급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해고한 것이다. 자격이 없다는 이유란 실장이 정식 직원은 아니고 근무시간이 불규칙한 일종의 촉탁직이었다나 뭐라나. 가당찮았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실장은 혹시 모를 분쟁을 대비해 반박 서류를 쟁여두었고 가깝게 지내는 변호사와 임금 체불과 불법 해고의 이유를 들어 소송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근무확인서'는 실장이 그 학원에서 3년에 걸쳐 정식 직원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로, 그 기간 동안 그녀 지도 아래 배웠던 학원생들로부터 직접 자필로 받아내면 증거물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대서 요청을 하러 다니다가 깎새 차례가 된 게다.  

   그 지경에 이르게 되기까지 겪었을 속앓이야 당사자가 아니면 가늠조차 하기 어렵겠으나 깎새 평정심마저 일순 뭉개 버린 건 원장이 실장이에게 보낸 카톡이었다. 두어 줄로 된 문자가 다인 해고 통보. 젊은 남자 원장이 이기적이고 싹수머리없기로는 깎새가 학원을 드나들 적부터 진작에 알아챘지만 이렇게까지 무례하고 비정하며 몰지각한 말종일 줄이야. 원장 본인으로서야 가장 편하고 손쉬워서 자행했을 테지만 문자 해고 통보야말로 그걸 본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잔인한 짓이다. 

   펜을 굴리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깎새는 꾹꾹 눌러쓴 글씨로 서류를 작성해 넘겨 줬다. 결론이 언제 어떻게 날지 예단할 순 없다. 그저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도닥여줄밖에. 건승을 기원했다. 


당신의 (역)진화

- 얼굴, 음성, 그리고 문자

                           신형철


​   불쑥 찾아뵈어서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거의 할 일이 없어졌다. 특별히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미리 전화를 하지 않고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이제 우리는 불쑥 전화드려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먼저 보내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아무개입니다. 편하실 때 잠시 통화하고 싶습니다. 언제 전화드리면 좋을까요. 어제만 해도 나는 이런 문자를 두세 사람에게 보냈고 또 두세 사람에게 받았다.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우리는 축소돼왔다. 이것은 진화일까?

   원래 당신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랬다. 걸어가서 기다리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신의 맞은편에 앉아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선을 감당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표정이 머금고 있는 의미를 해독하는 일이다. 나와 당신이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 일은 만만찮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노동이다. 이때 당신은,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부담스러운, 타인이다. 현대 인문학에서는 흔히 '타자(他者)'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하자. 이때의 당신은 '얼굴-타자'다.

   전화가 발명된 이후에 당신은 하나의 '음성'이 되었다. 이 문명의 이기 덕분에 우리가 덜 수 있게 된 것은 걸어가고 기다리는 수고만이 아니다. 당신의 시선을 견뎌내고 표정을 읽어내야 하는 노역을 얼마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 더 중대한 변화였던 것은 아닌지. 전화 속의 당신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 그저 하나의 음성일 뿐인 존재다. 이를 '음성-타자'라고 하자. 얼굴-타자보다 음성-타자가 더 편안하다. 전화는 만날 수 없는 고통을 덜어주는 기계이지만,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되어주는 기계이기도 하다.

   휴대폰 덕분에 당신은 마침내 '글자'가 되었다. 물론 문자메시지는 편리하다. 그런데 그 편리함 중에서는 심리적 편리함의 비중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통화보다 오히려 문자를 더 많이 이용하는 시대/세대가 그렇게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얼굴은커녕 음성조차 갖고 있지 않은 글자로서의 타자, 즉 '글자-타자'만큼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자메시지는, 이후의 통화와 그 이후의 대면을 위한 준비 작업일 때도 있지만, 더 은밀하게는, 모든 일이 이 문자의 층위에서 다 해결되면 좋겠다는 소망의 매체이기도 하다.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당신은 축소 조정돼왔다. 그러면서 당신은 쉬워졌다. 이 변화의 와중에 당신이 뭔가를 점점 잃어왔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 하면서 느끼게 되는 바로 그것, 그 '다름' 말이다. 철학 책에 자주 나오는 용어대로라면, 타자의 타자성(他者性, otherness) 말이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본의 아니게 점차 축소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온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당신을 만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음성조차 듣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라는 글자와 대화를 나누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변화라고 누구도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글자-타자로만 만나면서 편안해할 때 당신도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 나는 결별 선언과 해고 통지를 문자메시지로 받은 사람을 알고 있다. 그의 불행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글자보다 더 축소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진화일까 아닐까. 이런 생각을, 당신에게 문자를 보내놓고 전화를 기다리면서, 나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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