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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28. 2024

단절

   아버지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작년 말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청년은 당직이나 특근이 잡히지 않으면 주말마다 부산집으로 온댔다. 쉬는 날 자취방에서 빈둥대느니 엄마가 해주는 집밥 먹는 게 나을 성싶어서. 임용된 지 얼마 안돼 그렇지 적응하면 임지에서 취미를 찾아 즐기거나 좋은 사람 사귀면서 보내는 게 무료한 생활을 이기는 데 유익하지 않겠냐는 깎새 충고에 '하긴' 수긍하는 눈치였다. 

   "마음 맞는 동료들이랑 조를 짜서 자체 야구단을 결성해 같이 운동하고 술 마시고 좋은 데로 여행도 다니면서 인생 재밌게 사는 친구가 있었더랬죠. 공무원으로 직업 바꾼 자기 선택을 꽤나 자랑스러워했죠. 만나지는 않아요. 연락 끊은 지 좀 돼서."

   야구를 하든 어울려서 술을 마시든 여가생활이란 걸 즐길 줄 알아야 사회생활에 이롭겠다는 요지로 주절거렸지만 군말 괜히 꺼냈다 싶은 깎새는 뒤끝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별책부록인 양 따라와서.

   고달팠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으로 귀향한 2002년 가을께 그를 처음 만났다. 보험회사 정직원을 사직하고 보험설계사로 전향하려고 귀향한 깎새나 역시 보험회사 영업소장으로 근무하다 회사에서 권유한 명예퇴직을 받아들인 뒤 그 회사 보험설계사로 변신한 그나 이력이 엇비슷하고 한동갑인데다 산책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아파트 주민이라는 연대감으로 금세 친해졌다.  

   일하는 곳 같고 집도 한 방향이라서 밤낮없이 어울려 다니긴 했으나 기질은 천양지차였다. 맺고 끊는 단호함과 강한 추진력, 겉으로는 털털해 보이지만 속으로 단단하게 품은 출세욕 혹은 과시욕이 기실 그를 그답게 규정짓는 아이덴티티였고 그 맞은편에서 그런 그를 동경의 대상으로 추종하던 깎새였다. 성향이 달라서인지 둘은 제법 잘 어울렸다. 그게 진심어린 배려로 상대의 결함까지 감싸주는 든든한 우군으로서 관계가 공고해지는 줄 착각한 깎새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사람 볼 줄 모른다.  

   보험설계사로는 더 이상 앞이 안 보인대서 막살하고 공무원학원에 처박혔을 때 더는 어울릴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 깎새 같으면 엄도도 못 냈을 지난한 도전을 자청한 용기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그라서 가능한 결단이고 그라서 승산이 충분하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국수로 때우는 한끼 밥값조차 식구 눈치를 보면서 손을 벌려야 하는 늦깎이 수험생 처지를 달래 주려고 깎새는 수시로 학원을 드나들었다. 밥을 사주거나 심사 울적해진 그를 위해 저녁 술상까지 봐주곤 했다. 그 당시 처지라는 게 따지고 보면 도긴개긴이었는데도 수험생보다야 돈 버는 설계사가 나으니 형편이 닿는 힘껏 그를 북돋워 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깎새.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어리석게도. 도전과 성취를 향한 그의 노고에 비해 그 성원이라는 게 너무 초라해 보여서.

   첫 도전 만에 덜컥 합격을 하고 본가가 소재한 지역 동사무소로 발령이 나자 그는 살던 아파트를 세 놓고 본가와 합쳤다. 여건이 달라지니 만나는 빈도수가 줄고 둘 사이 공기도 달라졌다. 우선 내리막길인 설계사 수입을 만회하려다 가족 몰래 빚까지 얻더니 궁색함이 자글자글해진 깎새를 대신해 그가 술값을 도맡아 냈다. 약속이 잡히면 그것에만 매달리는 깎새와는 달리 요긴하지는 않으나 옛정이 밟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만남을 곁딸린 선심 정도로 치부하는 그가 종종 목격되기도 했다.   

   구청, 동사무소를 오가며 세련된 일처리, 거침없고 위트 넘치는 말주변과 특유의 친화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잠재력을 만개한 그는 만날 적마다 득의만만했다. 그의 주가가 한창 오를 무렵 완전히 쪽박을 찬 깎새는 쭉정이 신세로 전락했고 그런 깎새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멸시와 냉대가 심심찮게 묻어나오자 깎새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속물적 잣대를 들이밀어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순수한 관계라고 자부했건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하게 균열이 간 상태에 이르렀단 걸 가리늦게 깨달은 깎새는 파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만날수록 피로해지는 관계라면 더 이상 정상적이지 않다. 한때 좋았던 인상을 볼모로 인연에 연연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다. 그가 진작에 암시한 관계 정리의 메시지를 뒤늦게나마 해독한 깎새는 전화번호를 지웠다. 그 이후로 당연한 일이지만 둘 사이에 기별이 오간 적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마침내 단절되었다.

   먼저 단절을 택한 처신을 후회하지 않았다. 친구라는 존재로부터 하찮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모멸감은 의외로 오랫동안 질기게 깎새 정서를 장악해서 이쪽에서 먼저 단절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 택한 자구책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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