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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29. 2024

깎새가 비굴해지는 순간

   어지간해서는 손님 앞에서 안 꿀리게 단련이 된 깎새가 비굴해질 때가 딱 한 번 있다. 손님이 요금을 계산하겠다면서 카드를 내밀 때다. 

   "요금이 워낙 싸서 카드 단말기가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현금을 내주시고 현금이 없으시면 번거로우시겠지만 은행 계좌로 이체 부탁드립니다."

   굳이 장황하게 부탁하지 않아도 내미는 카드에 당황해하는 깎새를 보자마자 알아서 지갑에서 현금을 찾거나 스마트폰을 꺼내 은행앱을 여는 반지빠른 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시대를 역행하는 깎새의 반동성을 질타하는 손님 앞에서는 대응이 여전히 궁할 수밖에 없다. 희한한 건 카드 단말기로 깎새를 궁색하게 만드는 부류가 대체로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유치원생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둔 엄마들의 모임에서 카드 단말기 없이 영업하는 깎새가 못마땅하니 방문 순번을 정해 구차한 분위기를 연출시킴으로써 깎새를 응징하자는 결의라도 한듯 젊은 엄마들이 특히 유난을 떤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끽해야 초등학교 저학년생인 사내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젊은 엄마가 투블럭으로 깎아달라고 주문했다. 일반 커트는 5천 원이지만 투블럭은 8천 원을 요금으로 받는다고 안내했더니, "밖에 걸린 요금표에 5천 원이라고 써붙여 있길래 부담없이 들어왔는데"라며 미간을 찌푸리는 게 빈정이 상한 낌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냥 상고로 깎아 주세요" 퉁명스럽게 주문을 바꿨다.

   막 아이 머리에 손을 대려는데 이번에는 "카드 결재 되지요?" 묻는다.

   "요금이 워낙 싸서 카드 단말기가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현금을 내주시고 현금이 없으시면 번거로우시겠지만 은행 계좌로 이체 부탁드립니다."

   멘트가 구차할지언정 정중해야 한다. 그래야 돌아오는 대답이 순순해지니까.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요즘 세상에 카드 안 되는 점방이 어디 있어요?"

   응수하는 순간 볼썽사나워질 게 뻔해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묵묵부답 모드로 전환. 그만치 비굴하게 굴었으면 우위에 섰다고 여긴 손님이 승자의 아량을 베푸는 게 수순이건만, 

   "다음에 올게요. 아들, 가자."

   커트보를 휙 거두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린다. 가끔 겪는 일이라 던져진 커트보를 무덤덤하게 개킬 뿐인 깎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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