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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r 15. 2024

균열

   너나들이하는 사이인 줄 알았다. 같은 아파트에서 형 동생하며 지내는 이웃사촌으로 따분하다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네 선술집으로 불러내 소주잔 기울이는 허물없는 사이인 줄 알았다. 두 영감 머리 깎는 주기는 다르지만 공교롭게 마주치기라도 하면 정겹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먼저 와서 머리 다듬고 염색까지 마친 형뻘이 동생뻘 볼일 끝날 때까지 대기석에 앉아 진득하게 기다려 준다. 그런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깎새가 다방 커피 한 잔 타서 올리면 홀짝대며 지그시 동생뻘을 바라본다. 그러면 동생뻘이, "요 앞 순대집에서 소주 한 잔 때리까요?" 의향을 묻고 "집 근처로 가는 게 어때?" 응수하는 형뻘이다. 안주로 뭘 먹을지는 차차 의견 접근을 보기로 하고 낮술인지 밤술인지 일단 한 잔 때리기로 낙착을 본 셈이다.    

   오래전부터 도타웠을 리는 없었을 테다. 일흔을 넘겨 은퇴생활이 무료해질 무렵 우연찮은 계기로 통성명을 했고 어울린다고 낯 깎일 위인은 아니겠다 싶어 의기투합했을 공산이 크다. 나이 들면 주둥이만 산다고 능청스럽게 수다를 이어가는 두 노인을 보고 있노라면 친구란 가차울수록 빛이 나는 존재임을 확신하는 깎새다.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감감소식인 죽마고우는 없느니만 못하다. 제 나이만큼 가속도가 붙은 노화를 조금이라도 늦추자면 자주 만나 끊임없이 씨부리면서 감정을 즉시즉시 드러내는 감수성 증폭 훈련을 거르지 않고 낮술을 마시든 노인일자리를 다니든 활동성을 병행하는 게 중요할 성싶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마음 맞는 친구랑 재밌게 지내야 곱게 늙을 수 있다는 소리를 어렵게 꼰 표현임이 분명할진저. 

   그런 두 영감 사이에 균열이 감지됐다. 발단은 노인일자리인 성싶다. 동생뻘 영감은 수완이 좋아서인지 노인일자리를 신청하는 족족 걸리지만 형뻘은 쉽지 않은가 보더라. 작년에 탈락의 고배를 마신 형뻘이 와신상담해 올해 초 서류를 재차 들이밀어 합격을 했다는 소식을 동생뻘 영감을 통해 들었다. 하지만,

   "며칠 다니다가 그만뒀더라구."

   "그렇게 원하시더니만 왜요?"

   "나도 모르지. 변덕이 심해 될 것도 안 돼."

   노파심이 들었는지 깎새한테 다짐을 받는다.

   "노친네한테 내가 한 말 입밖에도 내지 말어. 공연히 오해 살라."

   며칠 뒤 형뻘 영감이 점방을 찾자 호기심을 못 이긴 판도라가 상자를 열듯 입이 근지러워 미칠 지경이던 깎새가 말문을 열고 말았다.

   "노인일자리 어찌 되셨어요?"

   "떨어졌어."

   '에잉? 동생뻘 영감 말하고 다르잖아.'

   "또요? 왜요?"

   "재산이 기준 초과라나 뭐라나."

   "작년에 그것 때문에 떨어져서 두 번 실수는 안 한다 단단히 벼르셨는데..."

   "나도 영문을 모르지. 아무튼 또 떨어졌어." 

   "동생뻘 어르신은요?"

   "채용 담당자가 좋아할 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올해도 됐어. 해마다 되는 놈만 돼. 기분 더러워서."

   둘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안 된 걸 됐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해 이득 볼 일이 별로 없을 듯한 동생뻘 영감 말에 더 무게감이 실린다. 하지만 꺼림칙한 무엇 때문에 중도에 그만둔 사정을 대놓고 밝히지를 못해서 괜히 실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느니 아예 낙방했다고 선수를 치려는 수작질일지언정 그러는 형뻘 영감도 수긍할 수 있는 깎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우여곡절은 누구나 있는 법이니까. 정말로 올해 또 떨어졌을지 모르는 일이고.

   문제는 두 영감이 내놓은 대답에서 느껴지는 날 선 뉘앙스다. 더 파고들었다간 어떤 충격적인 뒷담화가 튀어나올지 몰라 그쯤에서 관뒀지만 둘 사이 균열이 심상찮은 건 분명했다. 사람 사이는 겉만 보고 예단하는 게 아님을 새삼 깨달은 깎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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