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듣는 클래식 FM 라디오에 실황공연만 전문적으로 틀어주는 프로가 있다. 거기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가 보름 사이에 연주 주체만 달리해 두 번씩이나 전파를 탔다.
연식이 된 사람들에게는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메인 테마로, 젊은 세대들에게는 에니메이션 <디지몬>의 BGM이나 최근에는 영화 <밀정>, 드라마 <스카이캐슬> 삽입곡으로 알려졌는데 지극히 단순한 구조와 멜로디로 최상의 효과를 구현한 음악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스네어드럼의 스페인 볼레로 리듬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단 두 선율만이 악기를 바꿔 가면서 17분 가까이 이뤄지는 연주는 중독성이 강하다. 주 선율이 몇 번을 반복하는지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봉을 잡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영상(라벨이 원했던 원 박자에 가까운 17분 연주라고 해서)을 틀어놓고 세어 봤다.
1선율 - 1선율 - 2선율 - 2선율 - 1선율 - 1선율 - 2선율 - 2선율 - 1선율 - 1선율 - 2선율 - 2선율 - 1선율 - 1선율 - 2선율 - 2선율 - 1선율 - 2선율
개별 악기(특히 관악기)가 솔로로 선율을 번차례로 연주하다가 현악기군이 개입하면서 악기들의 소리가 크레센도(점점 강하게)로 차곡차곡 쌓이더니 대단원에서 일거에 와르르 무너지는 붕괴미는 <볼레로>가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다.
단 두 선율만으로 음악적 감동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단순함으로부터 아름다움을 구현해 낸다는 미니멀리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모리스 라벨이 미니멀리즘 사조의 추종자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최소 재료로 최대 효과를 실현한 모리스 라벨이야말로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가 아닐까 싶다.
가장 단순해야 가장 아름답고 편하다는 경지도 대단하지만 소유욕으로 찌든 정신이 금욕의 미덕을 깨닫는 변혁이 더 어렵다. 내 마음에 얽히고 섥켜 있는 숱한 미련의 사슬을 언제쯤이면 끊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 법정, <무소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