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같은 시각에 와 주는 게 좋아.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리고 네 시가 다 되었을 때 나는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그렇지만 아무 때나 온다면 나는 몇 시에 맞추어 내 마음을 단정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례儀禮가 필요해.
- 「어린 왕자」에서
1.
다음주 월요일 저녁에 한 잔 빨자고 금요일 연락이 왔을 때부터 들떴다. 미련곰탱이 같은 녀석이 먼저 친히 기별한 것만도 황감한데 술대접까지. 친구 만날 날만을 고대해본 지가 얼마만이던가. 월요일 저녁을 향해 느려터지게 더디 가는 시간이 야속하다가도 그 기다리는 시간을 디비쪼듯 즐기는 나를 발견한다. 얼른 친구를 만나고 싶지만 만남까지의 대기 상태가 더없이 행복하다. 어쩌면 나는 녀석을 만나는 자체보다 기다림을 즐기는 상황에 더 흥분해하는 변태일지 모른다.
월요일 아침 녀석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액정 화면에 녀석 이름이 떴을 때 갑자기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경험 상 만나는 날 아침에 연락이 오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약속을 미루든가 변경하든지. 통화도 하기 전에 짜증이 일었다. 내 행복을 짓밟을 순 없어! 허튼소리가 나오면 그 즉시 쌍욕을 날릴 태세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L이 죽었다.'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망자는 의례를 모른다. 하여 남은 자는 당황스럽다. 내 짧았던 행복도 급작스런 이별에 묻혀 속절없이 사라졌다.
2.
7년 전 어느 날, 출장 차 부산 내려가면 꼭 포장마차엘 들르겠다고 몇 주 전부터 설레발 치던 P. 서울 여의도에서 전도유망한 증권맨이 부산 한적한 포구 한 귀퉁이에 자리한 궁상맞은 포장마차에 납시겠다는 약속이 그저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었다.
같은 대학교 ROTC에서 동고동락했고 임관 후 사단만 다를 뿐 강원도 원통 윗동네 아랫동네에서 군생활한 것도 각별했지만 전역 후 한 회사에 공채 동기로 같이 들어갔으면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이후로 일마다 쪽박 찬 나와는 반대로 큰물에서 놀겠다는 출세욕이 강했던 P는 특유의 근성으로 좁은 부산 바닥을 탈피해 상경, 여의도 금융가에 입성한 뒤 한창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격이 안 맞으면 암만 친구라도 모양이 빠지는 법이거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포장마차 주인장을 친구랍시고 여전히 대우해 주는 게 고마워서 P가 내려온다는 그 날을 달력에다가 대문짝만하게 표시를 해두고 고대했다. 그가 오는 날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연산 회를 떠놓겠다, 장어구이보다는 보양식이라는 장어탕이 나을 것이다, 가리비는 됐고 전복을 사서 굽고 죽도 끓여 놔야겠다며 그를 위한 만찬 시나리오를 연일 펼쳤다 접었다 했다. P와 나는 친구 이상이었다. 그가 상경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형제처럼 지냈다. 좌절하면 위로해줬고 다시 일어서면 진심어린 응원을 해주는 사이였다. 소울메이트까지는 아니지만 서로를 의지가지했던 우애는 시간이 흘러도 각자의 신세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나는 확신했었다.
온다는 당일 오전에 오후 6시 전까지 업무를 마치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들떴다. 얼마만의 해후인지 손가락으로 꼽았다. 오후 서너 시쯤 내가 연락을 했다. 마지막 업무를 보려고 한 시중 은행 지점을 방문 중이라고 했다. 일상적인 업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고 꼬붕이 붙어 다닌다고 했다. 달랑 혼자 오지는 못할 테니 주안상은 삼 인분으로 준비해야겠다고 고쳐 먹었다. 오후 6시, 연락이 없었다. 오후 7시, 역시 연락이 없었다. 오후 8시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았다. 활어직판장 단골집에 걸었던 회, 장어, 전복 예약을 취소했다. 그날따라 손님도 안 들었다. 부엌에 들어가 맥주와 소주를 섞어 연거푸 들이켰다. 초저녁임에도 장사 작파하고 동네 선술집에 처박혀 진탕 퍼마셨다. 다음 날 아침 P에게서 문자가 왔다. 은행 직원들과 회식을 가졌다, 돌발적인 상황이어서 운신이 어려웠다, 오래 끌지는 않았지만 몹시 피곤했고 같이 온 일행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잡아둔 숙소에 들어가 바로 잤다, 뭐 그런 내용.
문자를 확인한 뒤 P의 연락처를 지워 버렸다. 녀석의 무심함 이전에 나 혼자 착각한 행복의 허상이 발각된 듯한 수치에 서러웠고 그걸 적나라하게 일깨워준 녀석이 고마웠지만 더는 덧정이 사라져서다. 내가 책을 낸다는 소문을 듣고 크라우드펀딩에 참가한 P한테 감사 문자를 보내기 전까지 녀석과 나는 완전히 두절됐었다. 의례가 필요했다. 앞으로도 필요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