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하지 못한 빚

by 김대일

그제 아침에 집 전화기가 울렸다. 손녀들 목소리 들으려고 당신이 정해 놓은 저녁 시간에 부친이 연락해오는 것 외에 아침 벨소리는 전혀 뜻밖이라 긴장했다. 난데없는 아침 전화는 비보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여자였고 서울 말투였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그녀는 울 엄마 바로 위 언니, 세째 이모의 외동딸이다. 미국 하와이에 거주한 지 오래됐다. 나와는 다섯 살 터울이고 어릴 때부터 난 누나를 몹시 따랐다. 이모네가 강원도 원주에서 살 때, 아마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울 엄마는 여름방학이면 나와 두 살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원주 언니집으로 피서를 떠나곤 했다. 거기서 여름 한 철 나는 게 연례행사였고 내 유년기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혼자라서 외로움을 심하게 타던 이종사촌 누나는 우리 형제를 친동생들인 양 귀여워했고 참 잘 대해 줬다. 친누나라면 이랬을 거란 전형을 나에게 심어 준 누나가 식구들 모두와 미국으로 이민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한 켠이 뚫린 듯한 허전함으로 한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미국 하와이에 정착해 경찰인 매형을 만나 그럭저럭 산다는 소식을 서울 둘째 이모네를 통해 전해 들었던 건 내가 감당하기 벅찬 빚에 휘둘려 만신창이로 전락했을 무렵이었다. 염치 따위 개한테나 줘 버리고 쉴 새 없이 돌아오는 사채 이자를 메꾸려고 알 만한 사람이면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고 다닐 그 즈음,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소문해 오랜만에 듣는 동생의 목소리에서 어떤 불길한 낌새를 챘던 누나였겠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어이없는 내 부탁을 두말없이 들어줬다.

- 돈 좀 빌려줘. 꼭 갚을께.

누나가 이후로 가끔 연락을 했던 건 빌려준 돈을 받겠다는 심산이 아니었다. 그저 불안과 초조에 찌든 동생의 안위가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곧 갚겠다는 허황된 약속만 되풀이하다가 무성의하게 통화를 끝내곤 했다. 급기야 누나 연락처를 차단 번호로 등록시켜 버렸다. 그렇게 나는 미쳤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외가 이종사촌들 사이에서 나는 인간 말종으로 찍혔고 그들 중 한 사람은 분에 못 이겨 내게 직접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혼미했고 해결보다는 외면하는 데만 급급했다.

막내이모(외가 형제 중에 울 엄마가 막내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주소록을 뒤지다가 오래 전에 메모해뒀던 우리집 번호를 발견했고 혹시나 해서 연락을 했다고 누나는 수줍게 말했다. 하와이에서 LA로 이사를 갈 예정이라고도 했다. 치매 판정을 받은 아버지(이모부) 부양 문제와 경찰관을 정년 퇴직한 매형의 노후생활 문제를 같이 해결하기 위한 결단이라면서.

- 누나, 정말 미안해요.

돌려받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뻔한 거짓말만 늘어놓고 전혀 솔직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예전의 너는 안 그랬는데.

딸애들 이름을 대면서 근황을 물어왔다.

- 누나가 우리 애들 이름을 어떻게?

- 내가 왜 몰라.

- 누나네는 애가 하나던가?

- 큰아들이 있긴 하지. 사람같은. 매형이랑 공을 많이 들였는데 안 생기더라고. 사람 자식이라고 여기고 산다.

- …

잔인하리만치 이기적이고 무정한 이면이 내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그 야누스적 이중성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기 위해 불가피했던 투쟁심이라고 피를 토하듯 항변해본들 나란 놈의 허위에 실망해 절연을 택한 이들을 돌이킬 수는 없다. 훗날 도의적 상환이 이뤄진다손 이미 찍혀 버린 낙인을 어찌 지우겠는가. 그게 누나와 통화를 마치고 가슴이 먹먹해진 까닭이다.

여지인 야반생기자 거취화이시지 급급연 유공기사기야

厲之人 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惟恐其似己也

(언청이가 밤중에 그 자식을 낳고서는 급히 불을 들어 비춰보았다.

서두른 까닭인즉 행여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장자(莊子)」에서 읽은 글입니다.

비통하리만큼 엄정한 자기 응시, 이것은 그대로 하나의 큼직한 양심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청산하지 못한 빚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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