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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24. 2024

멍청해지기 싫다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제일 악평이 '쌀로 밥 짓는 얘기'라고 했다. "버스를 탔는데, 내렸어요"나 "밥을 먹었는데요, 배가 불렀어요" 식으로 너무 뻔해서 쓸모가 전혀 없는 글을 뜻하는 방송가 용어라나. 내처 글쓰기에서 가장 금기시해야 할 게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이야기', '아는 사람의 아는 이야기'라고도 했다.

   사나흘 심하게 몸살 감기를 앓고부터는 변비까지 심해졌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한 번, 점방 출근해 개점하기 전 한 번, 두 번은 꼭 볼일을 보는 루틴은 여전하지만 헛심만 쓰다 마니 뱃속에 똥덩어리만 가득찬 듯한 불쾌감이 일상을 내내 짓누른다.

   문제는 변비가 머리통에도 왔다는 거다. 언제부터인가 '쌀로 밥 짓는 얘기'라도 부러우리만치 말도 안 나오고 글도 안 나온다. 막상 떠오른 착상을 풀어내고자 해도 그에 부합하는 단어가 전혀 생각나질 않고 허무맹랑한 개소리괴소리 일색이라. 한 마디로 되지도 않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씨불이는 것도, 글을 끼적이는 것도 성가시기만 하다. 이럴 거면 매일 글 올리는 짓도 그만둬야 할 판이다.

   헌데 일상을 근근이 지탱하는 습관을 일거에 없애 버리면 사람이 어떻게 변질이 될지 두렵다. 하여 머리통 변비를 없애고자 하는 데까지 용을 써 볼 작정이다. 단어가 안 떠오르니 단어장이란 걸 만들어 손으로 써 볼 참이다. 책을 들어 남들이 쓴 기가 막힌 명구는 베끼거나 시를 읽듯 줄줄 외워도 보겠다. 실없는 소리를 지껄여도 받아줄 만한 손님이다 싶으면 노닥거려도 보고 집에서는 마누라와 마주 보고 돼먹잖은 농담이라도 지껄이겠다. 바라건대 멍청해지기는 정말 싫다.


​   조리에 맞지 않는 말의 기본적인 특징은, 사용하는 단어를 부정확하게, 그리고 일관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 단지 멋있게 들린다는 이유 하나로, 하드웨어(hardware)의 문제를 구조적(structural) 문제라고 부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가 "이 세탁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라고 하면, 그것은 세탁기 기계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세탁기 부품이 고장 났다는 뜻이다. 그가 "우리 사회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구성 요소들 간에 지속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건설된 댐이나 빌딩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가 일관되게 하드(hard) 혹은 하드웨어를 구조 혹은 구조적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서 파일을 프린터로 출력해달고 할 때, '하드 카피(hard copy)'를 한 장 출력해달라고 하지, '구조적 카피'를 한 장 출력해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이 한강 다리가 붕괴하는 것을 보며, "이 사회에는 구조적 문제가 있어"라고 주장한다면, 과연 한강 다리라는 물리적 대상에 문제가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부실 건축의 원인이 한국 사회의 틀 자체에 있다는 말일까.

   의사소통을 하다가 그만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소통 중에 사용되는 유사어 간의 차이를 판별해야 한다. 이를테면, 구름, 수증기, 김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해보자. 수증기는 물이 투명한 기체 상태로 된 것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반면, 구름은 수증기가 작은 물방울, 혹은 얼음 알갱이로 변하여 공중에 떠다니는 것으로서 가시적인 것이다. 김 역시 수증기가 찬 기운을 받아서 엉긴 작은 물방울로서 수증기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거창한 주장을 할 때 종종 들먹이는 국가, 정부, 사회, 공동체 등의 단어들, 그리고 민족, 겨레, 종족 등의 단어들 역시 유사하지만 다른 단어들이다. 그러한 단어들의 뜻을 제대로 판별하여, 맥락에 맞게 활용하지 않는 한 정교한 의사소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교'나 '실학' 같은 단어의 의미를 통제하지 못한 나머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 한국의 어떤 학술 담론처럼.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어크로스, 19~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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