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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25. 2024

깎새의 여름

   파란색 추동 와이셔츠를 개조한 작업복을 벗어던지면 여름이 시작된다. 터럭이 안 끼게 팔뚝까지 오는 토시를 받치는데 그 속으로 땀이 삐질삐질 나면 반팔을 입을 때가 된 거다. 작년까지는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탈피를 했지만 올해는 열흘 이상 빠르게 입성을 가볍게 했다. 지구 온난화가 피부로 점점 와닿지만 아무튼 바야흐로 깎새의 여름은 시작됐다. 

   여름이 오면 기대도 크다. 기온이 올라 혈액 순환이 빨라지면 사람 몸에 난 털에 영양 공급이 원활해져 겨울보다 근 10%나 빨리 자란다고 한다. 봉두난발을 고수하는 자신이 혐오 그 자체임을 무시로 깨닫는 무더운 날이면 아니 깎고는 못 배긴다. 한 번 깎을 거 두 번 깎게 부추기는 계절이 여름이니 다른 때 비해 매상이 오를 개연성이 크다. 

   아침저녁으로 한결 가벼울 거이다. 엄동에는 돌덩이를 이고 사는 것처럼 지뿌드드했던 몸뚱아리였다. 깎새같이 아침 댓바람부터 부산스러운 아침형 인간한테는 늦게 동이 트고 일찍 해가 지는 동절기가 몹시 고단하다. 생체 리듬에 오작동이 빈번해 삐걱대기 일쑤여서. 그러니 알맞게 쾌적하고 따뜻한 공기가 조석으로 심신을 진작시킬 여름은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계절이면서 돌아온 전성기이다. 게다가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서 "무조건 GO!"를 외친 이래로 민소매 옷을 걸쳐도 전혀 거리낌이 없을 몸매로 탈바꿈하려는 의지에 다가올 여름은 터보 엔진까지 장착할 심산이다. 비 오듯 땀 흘리며 러닝머신을 구르다 체중계 숫자 줄어드는 맛에 오르가슴을 느껴 버리는 여름이야말로 변태의 계절임이 틀림없다.   

   여름이 왕성해지면 항상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가 누구인지 특정하진 못하지만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니 특별한 인물임에 틀림없겠다(특별한 그를 간절히 바라듯 상대방도 깎새를 간절히 그리워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운이 좋아 재회를 하면 더할 나위 없고 이 좋은 계절에 못 만난다고 해도 기다리는 마음만으로도 여름 내내 들떠 있을 깎새다.

   여름은 기분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행복한 상상을 시도 때도 없이 불러일으키는 마성을 지닌 계절이다. 상상이 현실이 변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계절이기도 하고. 하여 여름은 추억을 쌓기에 용이한 계절이다. 기억의 주름 속에 올 여름 빚어낼 추억 하나 깊이 새겨지길 바란다. 사람이든 돈이든 뭐가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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