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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26. 2024

동 이름을 영어로 짓겠다고? 또 지랄한다

   점방에서 한번은 특이한 장면을 포착했다. 삼대로 보이는 세 남자가 직계 혈통은 아닌 성싶은 게 '아버님'은 조선시대 때나 아들이 아비를 부르는 경칭이지 요즘 부자 간에 흔히 쓰는 바가 아니다. 대신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위가 아들 노릇한답시고 아양 떠는 수작이기 십상이리라. 결정적으로 화가 난 듯 거센 억양을 구사하는 게 전형적인 부산 사람임을 증명하는 초로와 비교되게 기름기 잔뜩 머금은 서울 사투리가 리드미컬하게 통통 튀는 젊은이 말투는 서로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보기 힘든 외관 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하여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서너 살짜리 꼬맹이는 외손자임이 틀림없으렷다.

   초로인 남자는 단골이었다. 다음주 집안 경사를 맞이하야 염색을 겸하겠다고 주문했다. 할아버지 머리를 깎고 염색약을 바르는 동안 대기석에서는 사위로 추정되는 애아빠와 외손자 꼬맹이가 꽁냥꽁냥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한참 꼬물꼬물 놀던 꼬맹이가 제 아비 바짓가랑이를 붙들더니 점방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예의 느물거리는 말투로 몇 번 타이르는가 싶던 애아빠가 짐짓 위엄스레 "○○야, 스탠답(Stand up)!" 명령했고 꼬맹이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애아빠가 머리카락과 먼지가 뒤범벅인 점방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면 몸이 지저분해지니 얼른 대기석에 다시 앉으라는 시니피에(기의記意)를 '일어나'란 한국말 대신 '스탠답(Stand up)'이라는 시니피앙(기표記表)으로 발현하자 꼬맹이가 이를 알아듣고 얼른 실천에 옮기는 모습은 생경했다. 제 자식을 이중언어 사용자, 즉 바이링구얼로 키우려고 영어 조기교육에 뛰어든 부모가 획득한 작은 성과물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순간, '사고의 언어'가 형성되기 전 여러 언어에 일관성 없이 노출되면 아이가 오히려 '모국어'를 잃어버려 내가 '나'임을 나타내는 '사고의 언어'가 없어 표현력이 어린 시절에 멈추게 되는 역효과가 생긴다는 옥스퍼드대 언어학 교수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중요한 건 '언제'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치느냐라고 했는데 꼬맹이는 과연 '사고의 언어'가 완비되었을지 저으기 궁금했다.(<조지은 옥스퍼드대 언어학 교수 "아이를 바이링구얼로 키우고 싶다고요? '사고의 언어' 형성이 먼저">, 경향신문, 2019.05.05.)

   영어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해 영어상용도시로 부산을 변모시키겠다며 부산시와 부산시교육청이 추진하려다 여론에 뭇매를 맞은 게 불과 2년 전 일인데 이번에는 부산 강서구청이라는 지자체에서 신도시 조성 지구 법정동 이름을 '에코 델타동'이라는 국적 불명의 외국어로 지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강서구의회에서 반대가 심하지만 구청은 강행해 현재 검토 승인 요청 중이란다.(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동 이름을 외국어로 짓겠다는 부산 강서구청>, 민들레, 2024.04.24)

   더 기가 막힌 건 동 이름을 외국어로 지으려는 이유다. 관할 부서인 강서구청 총무과장의 발언이다.

   "그냥 제 생각에는 요새 세계화 추세에 전국으로 처음인데 그냥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해보면 또 저희들을 보고 다른 데서도 아마 생길 수 있을 것 같고, 예."(출처:2024년, 제245회 부산강서구의회_회의록(2호), 위 글에서 퍼옴))

   2년 전 부산 영어상용도시 추진에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포석이라는. 하지만 그때도 이왕 깔 포석이면 전문 통·번역사와 자원봉사자, 정보통신기술 등을 잘 활용해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도우면 될 일이라는 반박이 일었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면 외국인이 살기 좋은 글로벌 도시가 될 것이고 세계박람회 유치에도 청신호라는 따위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은 영어 편의주의를 넘어 영어 사대주의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거셌고.

   개그맨이자 역사학자이며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이기도 한 정재환은 한 기고문에서 한국은 외국어 상용을 강요당한 아픈 역사가 있다면서 1936년 제7대 조선총독인 미나미지로에 의해 추진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강요당한 국어 상용을 예로 들었다. 여기서 국어란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였다.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말하게 한다는 완벽한 동화의 실현을 목표로, 1942년 5월 국어전해운동과 국어상용운동을 본격화하면서 학교나 직장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쓰도록 했다. 필자는 조선총독부의 '국어 상용'과 부산시의 '영어 상용'은 추진 주체와 대상어, 목적의 취지 등에서는 다르지만, 외국어 상용 강요라는 점에서는 같다면서 '국어 상용'은 동화의 실현이라는 식민 지배의 완성을 기도한 것이었고, 영어 상용은 세계박람회의 성공과 외국인도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영어 소통이 가능한 국제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인데, 자칫 부산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시민을 영어의 질곡에 빠뜨릴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정재환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외국어 '상용', 되풀이되는 악몽>, 경향신문, 2022.08.30)

   세계박람회 유치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마당에 또 무슨 명분으로 동 이름을 영어로 지으려는 것일까. 전국 최초로 법정동 이름을 외국어로 지어 국민의 이목을 끌려는 공무원의 비뚤어진 공명심? 그보다는 뼛속까지 박힌 영어 사대주의가 고스란히 발현된 혐의가 짙다. 영어만 갖다붙이면 품격이 올라가고 근사해 보일 거라는 착시는 덜떨어진 정신 상태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더 심각한 건 그런 증상이 대한민국에서 유독 부산 공무원들한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거다. 그냥 해보고 싶다는 발언이 부산 정체성 훼손과 겹쳐 안타깝고 분노가 치민다.

   한국말 시니피앙이 점령한 열 평 남짓한 점방에서 '스탠답(Stand up)'이라는 이국적인 시니피앙으로 몸을 기어이 일으켜 세우는 시니피에를 완수한 꼬맹이가 장하다고만 보긴 어려웠다. 아빠 말을 참 잘 듣는 '착한 아이'라고 깎새가 짐짓 내민 칭찬에 '자네, 나를 두고 하는 소리인가?'하듯 경계 섞인 시선으로 쏘아볼 뿐 묵묵부답인 꼬맹이가 단지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영 지울 수 없었다. 제 아비가 머리를 깎는 동안 초로 품에 안긴 꼬맹이가 제 외할아버지와 나누는 대화가 제 아비처럼 썩 원활하게 않아 보이는 까닭이 혹시 '사고의 언어'가 여물지 않아서인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영어의 질곡에 시민을 빠뜨리려고 작정한 부산 공무원들은 '사고의 언어'는커녕 '사고' 자체가 없어서 말 자체가 아예 안 통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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