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자기만의 버킷 리스트가 있다. 2017년 즈음, 무슨 생각으로 작성했는지 모를 목록을 우연찮게 다시 봤는데, 참 꼴같잖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목록이란 걸 작성할 당시 딴에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긴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라고 목록을 작성하지 말란 법 없으니 소심하게나마 순위를 적어 내려가 보지만 애걔, 고작 네 개 쓰곤 더 쓸 게 없다. 버킷 리스트라는 게 기실 세상살이를 통해 마주 대하는 체험의 빈도와 그로부터 여투는 지적 역량과 정의 관계를 이루는 바라 식견 밝은 사람일수록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게 많을 테고 따라서 그것들을 일일이 쓴 목록의 꼬리가 거짓말 좀 보태 끝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만 쳐다보듯 과문하기 짝이 없는 나같은 샌님은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조차 잘 모르는 답답함의 첨단을 달리는지라 그 버킷 리스트라는 걸 막상 작성하려 해도 멀뚱멀뚱한 채 하얀 건 종이요, 길쭉한 건 펜임을 확인하다 시간만 축내기 십상이라.
그럼에도 이 버킷 리스트 놀이의 묘미라는 것이 그동안 살았던 인생을 복기해 부족했고 아쉬웠던 점을 짚어낸 뒤 다시는 후회하지 않을 방도를 궁리해 여생을 효율적으로 즐기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손색이 없을 게다. 또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서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으로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듯 행복한 착각을 해대 의외로 혼자 노는 재미로 쏠쏠하다. 밑도 끝도 없이 울적해질 무렵 <버킷 리스트>를 꺼내 들어 미친 놈마냥 헤실거리다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지 모를 일이고 그러고 노는 게 꼴값으로 비칠지라도 제 정신 건강에 유익하기만 하다면야 이문 남는 장사인 셈이다.
그러면서 작성했다는 목록에 겨우 번호 네 개를 매겼는데 다음과 같다.
하나, 쉐보레 익스플로러 밴 운전하기(물론 내 소유인)
둘, 내 이름 박힌 책 내기(베스트셀러면 금상첨화)
셋, 세상의 이름난 냉면집 찾아다니면서 맛보기(커밍아웃하건데 나는 냉면 성애자다!)
넷, 쿠바 여행(물신숭배 손때가 덜 탄 쿠바임을 전제로)
한때 잘 나가던 탤런트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지금은 아주 한물간 맏동서가 불러주는 이가 드문데도 꼴에 연예인이랍시고 여전히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가 있던 십 수년 전, 온 가족을 싣고 시골 처가로 납실 때 몰던 차가 쉐보레 익스플로러 밴이었다. 결혼한 지 몇 년 안 된 철부지 일곱째 동서였던 나는 충북 음성 시골 바닥을 휘젓는 집채만 한 차를 구경하면서 그때까지 가졌던 차에 대한 고정관념이 일순간에 파괴되는 쇼크를 겪고 만다. 차에서 두 발 뻗고 잘 수도 있다니 이런 신기한 물건이! 물론 덩치에 맞게 놀자니 유지비가 적잖게 들지만 이런 차를 모는 차주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않겠냐며 가진 건 별로 없으면서 꺼드럭대던 맏동서를 두둔했것다. 그때 홀딱 반한 쉐보레 익스플로러 밴이 문명의 이기로는 유일무이한 로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어서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는 차가 캠핑카를 필두로 무수히 등장한 지 좀 됐다. 물가는 한정 없이 오르는데 호주머니 사정은 십수 년 전보다 더 퇴보한 탓에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모닝이라는 경차 주유하는 것조차 허덕대기 일쑤라 사람이 궁색해지면 핑계부터 찾는다고 당시도 만만찮게 들던 기름값을 현재 시세대로 대다간 집안 거덜내기 십상이라서 애물단지일 뿐이라며 태세를 전환하다. 또 식구 대동해 팔도 유람할 양이면 찻간이 널찍해 운신이 편하기로 매한가지인 카니발이 상대적으로 더 경제적인데다 풍찬노숙할 거 아니라면 잠은 좋은 데서 편히 자겠다는 노선으로 급선회하자 쉐보레 익스플로러 밴에 대한 동경도 한물간 맏동서마냥 시들시들해졌다.
그렇다고 달랑 네 개뿐인 버킷 리스트까지 폐기처분하고 싶지 않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 그걸 작성한 이도 줏대 없이 따라가긴 하지만 모두 없던 일로 하자니 그건 또 너무 섭섭해서 골격은 그대로 두고 디테일만 손봐 존속하는 것으로 낙착을 봤다. 하여 새로 고쳐 작성한 목록이 다음과 같다. 번호를 매기니 여전히 네 개뿐이지만.
하나, 쉐보레 익스플로러 밴 대신 카니발 리무진 7인승 운전하기(2종오토 자격증으로 몰 수 있는 차종 마지노)
둘, 내 이름자 박힌 두 번째 책 내기(쓰레기나 다름없는 첫 책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셋, 통영 다찌집 도장 깨기(통영에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뤄질 테지)
넷, 77번 국도에 흩어진 섬들 일주하기(비행공포증이 심하니 대신 배나 자동차로 다니는 게 신간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