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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12. 2024

짧은 허구

   깜냥이 안 되면서도 늘 갈망하는 게 소설이다. 쓴 걸 후회 안 할 소설 한 편 죽기 전에 남기고 싶다.

   짪은 허구를 예전에 끼적거려 게시해봤는데 반응이 영 신통찮았다. 당연한 일인데도 괜시리 서운했다. 생각난 김에 다시 고쳐 봤지만 전보다 나아진 것 같진 않다. 

   정녕 재주는 타고나는 걸까.


   면도


​   교탁을 치우자 칠판 앞이 훤했다. 불려 나가 밀대걸레 나무손잡이로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았다. 손잡이가 부러지자 담임은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양발로 연신 엉덩이를 걷어찼다. 일방적으로 린치를 당하면서 왜 맞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궁리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국민학교 6학년짜리 사내애가 담임한테 폭행에 가까운 체벌을 당해야 할 이유로 뭐가 있을까. 설령 있다 한들 그게 죽도록 처맞을 만치 무도한 것일까.

   - 부반장이나 됐으면서 못된 것만 배운 개새끼.

   국민학교 바로 옆에서 부모가 달걀 도매상 하는 같은 반 여자애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은 진작에 알았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기가 싫었다. 좀 산다고 젠체하는 꼴이 역겨웠고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로 찾아와 학생들이 보건 말건 담임한테 뭔가를 건네며 비굴하게 웃고 가는 여자애 엄마의 살이 통통 오른 얼굴은 더 꼴같잖아서라도 무심해야 했다. 

   학예회 준비가 한창이던 가을 어느 날, 연극 여주인공이 그 여자애로 갑자기 바뀌었다. 담임은 일방적으로 변경을 지시했다. 대본과 연기 연습을 하기 위해서 연극 파트 인원들은 방과 후까지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원래 협주 파트였던 계란 도매상 딸이 부반장이 남자 주인공인 연극 파트로 갈아탄 이유는 뻔했다. 여자애 엄마가 며칠 전 교실로 와 담임에게 누런 봉투를 건네는 걸 봤다는 급우가 있었다. 주인공이 바뀌고 재개된 연극 연습. 대사를 채 다 외우지 못해 자꾸 버벅대는 여자애를 보다 못한 부반장이 쏘아댔다

   - 대사도 못 외우면서 무슨 주인공이냐. 세상이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니?

   다른 아이도 아닌 부반장이 자기를 빈정거린 게 속상했던 여자애는 엄마 앞에서 서러워했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아이 엄마는 그길로 담임선생한테 제멋대로 내용을 부풀려 쏘아댔다. 이를테면 연극 파트 아이들이 여자애를 왕따시켰는데 그 주범이 부반장이다, 왕따도 모자라 대사를 못 외운다면서 애를 때리기까지 했다는 둥. 담임은 부반장인 아이의 해명을 들을 마음이 애당초 없었다. 누런 봉투를 주고받는 돈독한 사이였던 달걀 도매상 학부모를 달래는 일이 급선무일 뿐. 그러자면 이 사달을 최대한 신속하게 수습하는 모습을 연출해야 했고 가장 효과적인 게 체벌이라고 판단했다. 그것만이 담임으로서의 능력이자 몸값이라 여겼으니까.

   부반장은 봄에 치룬 학생회장 선거 때도 봉변을 당했다. 학생회장 선거는 6학년 각 반 반장이 후보로 나와 그들 중에서 선출되는 게 통상적이었다. 아이는 반 투표에서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담임은 학생회장 입후보자로는 부적격하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부반장으로 내려 앉혔다. 대신 그 국민학교 부근 아파트 단지에 사는 남자 아이를 단독 후보로 다시 올렸다. 그 아이는 반장이 됐고 학생회장도 됐다.

   1980년대 중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었다. 아파트에 산다는 아이는 당시에는 흔치 않던 운전사가 딸린 늘씬하게 잘 빠진 중형 세단을 타고 등교했다.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밍크 코트를 걸치고 목걸이와 귀고리를 치렁치렁 매달아 귀부인 티를 팍팍 내는 아줌마가 늘 동석했다. 그 아줌마는 반장 선거와 학생회장 선거일이 다가오자 학교를 휘저었다. 학생회장 선거가 일단락되자 자기 볼일은 다 마쳤다는 듯이 담임의 융숭한 배웅을 받으며 학교를 유유히 빠져 나갔다. 부인 뒤를 따르던 담임은 교문을 막고 주차해 있던 세단에 이르자 후다닥 먼저 달려가 뒷문을 열어제쳤고 좌석에 앉은 아줌마는 고개만 까딱거리며 거들먹거렸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영화의 한 장면인 양 반 아이들은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

   반 아이들끼리만 통하는 담임 별명은 망측했다. 아이들 앞에서 자기 사타구니를 긁어 대는 얄궂은 버릇에서 비롯되었다. 고질적인 습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아이들이 보건 말건 거기를 연신 긁어댔다. 여자애들은 흉하다며 고개를 돌렸고 남자애들은 담임의 요상한 버릇을 따라하며 재밌어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 '좆쟁이'였다.


   <김 씨네 이발소> 주인이자 <대성이용학원> 원장 대리인 김 씨가 모처럼 외출을 나갔다. 국민학교 동창회는 김 씨가 특히 꺼리는 모임이지만 회장인 강지형 원장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기분이지만 참석은 했다. 강 원장과는 국민학교 동창 중 유일하게 허심탄회하는 사이다. 호빵맨처럼 둥글둥글한 얼굴이 후덕한 인상을 주는 데다 수완까지 좋아 운영하는 한의원은 늘 문전성시다. 동창회장은 강 원장처럼 푼푼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추대된 뒤로 단 한번도 회장이 갈리지 않았다. 그래도 강 원장은 국민학교 동기들 만나는 재미가 사는 낙이라면서 모임을 주도하는 건 물론이고 사재를 털어 운영비로 보탰다. 국민학교 동창회 붐이 한창 일 무렵엔 음식점 한 곳을 몽땅 빌릴 만큼 대성황이었지만 요새는 명맥만 유지하는 모임으로 조촐해졌다. 조붓한 풍경에 어울릴 법한, 흘러간 옛 추억이나 곱씹는 재미로 왁자지껄한 건 여전했고 그때 그 사람이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다더라는 '카더라통신'도 여전히 득세했다. 남 얘기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만큼 재밌는 법이니까. 낯이 별로 안 선 남자 동기와 조곤조곤하게 얘기 나누던 강 원장 낯빛이 어두웠다. 그런 강 원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 씨가 물었다.

   - 무슨 일이야?

   ​- 좆쟁이 선생 알지?

   - 갑자기 이가 갈린다야.

   ​- 얼마 전에 한의원으로 찾아왔더라구. 몸이 불편해 침을 맞고 싶다면서.

   - 애들 두들겨 패던 완력은 어디 가고 아프다디?

   - 안색이 너무 안 좋더라. 얼굴이 시커매. 간이 안 좋은 성싶으니 큰 병원 가서 정밀진단 받아보시라고 권했지.

   - 근데?

   ​-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진철이한테 부탁했어. 얘가 마당발이야 병원 관계자들 사이에선. 혹시 비용이 부담돼서 그러신가 싶어 진철이한테 병원 좀 알아보랬어. 그리고 연결이 됐지.

   - 그러면 된 거 아냐?

   - 진철이가 병원 수속 관련해서 선생께 설명하려고 동창회 명부에 나와 있는 자택을 찾아갔더니 사모님밖에 안 계시더라는 거야.

   - 마침 밖에서 한 잔 걸치는 중이었겠지.

   - 그게 아냐. 사모님과는 이혼한 지 여러 해 됐대. 이혼 위자료 조로 자택은 사모님 명의로 바뀌었고 선생은 딴 데 사는가 보더라구.

   - 요새 황혼 이혼이 많대잖아. 대수도 아니구만 뭘.

   - 문제는 그게 아냐. 좆쟁이 선생이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와 늦바람이 난 게 이혼사유이긴 한데 그 여자가 또 꽃뱀이었다나 뭐라나. 사모님과 갈라선 뒤 그나마 쟁여둔 재산까지 몽땅 들어먹고 자취를 감췄다는 거야. 완전 거덜이 난 게지.

   - ….

   - 사모님한테 선생 병환 얘기를 꺼냈더니 갈라선 마당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했대.

   - 그럼 어떡하냐?

   - 동창회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그러니 고민이지.


   백발이 성성한 노인 머리를 깎던 학원생 김 여사가 한 노인과 옥신각신했다.

   - 머리는 깎아드리는데 면도는 못해요.

   - 자고로 이발의 대단원은 면도야. 이발사가 되겠다고 비싼 돈 들여 학원 다니면서 면도는 못하겠다니. 그럼 뭣 하러 학원엘 다니누? 돈이 남아 도는갑지. 돈이 철철 흘러 넘쳐 처치 곤란하면 나랑 노나 가집시다.

   - 근데 이 할아버지가 아까부터 거시기쪽을 왜 자꾸 긁어대. 망측하게시리. 

   무료 이발은 커트까지다. 면도와 정발(드라이) 과목이 포함된 자격증 반 학원생이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연습을 희망할 경우 무료 이발을 하러 온 사람한테 의중을 물어 아주 가끔 면도를 하긴 한다. 허나 위생과 안전 문제가 늘 따라다녀 수염이 부착된 통가발로 연습하는 게 통상적이었다. 그러니 참 드문 장면이었다. 학원생이면 몰라도 무료 이발 하러 온 사람이 면도해 달라고 생떼를 부리니 말이다. 노인이 비아냥거리자 속이 상한 김 여사가 커트보를 치다 말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김 씨가 다가가 거울에 비친 마스크를 쓴 노인의 두 눈을 유심히 쳐다봤다. 

   - 어르신, 마스크 한 번 벗어보시죠.

   ​- 역병이 창궐했는데 사람 많은 데서는 마스크 벗는 법이 아니우.

   - 물론 그렇지만 면도를 하자면 어차피 면도 거품 바르고 얼굴에 온습포도 올려야 합니다. 마스크 위에다 올릴 순 없잖습니까? 

   달리 대꾸할 거리가 없었던 노인이 마스크를 천천히 벗었다. 한 손으로는 마스크를 넓적다리에 내려 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기 사타구니를 연신 긁어댔다.

   - 여자분들이 민망해합니다. 자꾸 거시기쪽으로 손이 가시니.

   - 미안하외다. 젊을 때 습진이 심해 고생깨나 했다우. 하도 긁어댔더니 아주 몹쓸 버릇이 됐버렸어요. 덕분에 망측한 별명까지 얻었지만.

   - 망측한 별명이라니요?

   - 그런 게 있소. 애들은 내가 모를 거라고 지들끼리 소곤거렸지만 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그래도 어쩌겠수, 내가 자초했으니.

   - 애들이라면 자식들 말인가요?

   - 자식은 무슨. 내가 예전에 담임을 맡았던 반 아이들이오.

   - 교사셨구나.

   - 초등학교, 아니 예전엔 국민학교였지. 이 학교 저 학교 옮겨 다녔어도 망측한 별명이라도 붙여준 그 학교 애들이 생각이 제일 많이 난다우.

   - 추억이 많으셨나 보네요.

   - 내가 걔네들한테 죄를 많이 졌어. 애들 가르칠 생각은 안 하고 떡고물에만 온통 정신이 팔렸었지. 학부모 눈치나 살피고 적당히 비위 맞춰 주면 만사 오케이인 줄 알았으니까. 그러니 담임으로서 애들한테 신경이나 제대로 썼겠냐구. 당연히 추억거리랄 것도 없지.

   - 그런데 애들 생각이 왜 납니까?

   언성이 높아진 줄도 모르고 김 씨는 따졌다. 그런 김 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회상하듯 노인은 눈을 감았다.

   - 졸업식 때였어. 입학식이든 졸업식이든 일 년에 한 번 있는 따분한 연례행사로만 치부했었는데 그해 졸업식만은 달랐어. 아까도 말했지만 난 우리 반 애들한테 전혀 신경을 안 썼어. 걔네들을 떠나 보내는 날에도 한눈을 팔았으니까. 행사 마치고 학생회장이면서 반장이기도 한 아이 아빠가 초대하는 식사 자리로 얼른 달려가고 싶어 안달이 났어. 일 년 동안 수고했다며 혹시 금일봉이라도 줄까 싶어서 말야. 

   담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애들이라고 담임한테 석별의 정 따위가 있을까 싶더라구. 가는 정이 없는데 올 정이 있을 턱이 없지. 근데 졸업식 마치고 반에 모인 아이들이 막 울더라구. 일 년 동안 철부지 같은 자기들을 잘 가르쳐 줘서 정말 고맙다면서 말야. 똑같은 말 계속 하지만 난 걔네들한테 정말 해준 게 하나도 없었어. 근데 울컥하대. 갑자기 내가 그렇게 추해 보일 수가 없더란 말이지.

   김 씨 눈은 이미 충혈되어 있었다. 얼마나 빤히 노인을 노려봤으면.

   - 부반장 남자 아이가 썰물처럼 다 빠져 나간 교실에서 오도카니 한동안 앉아 있다가 다가오더라구.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또박또박 끝인사를 건네는데, 지금도 그 아이 두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아. 걔한테는 몹쓸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그랬던 나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형형하면서도 순진무구했어. 원망, 증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더란 말이지.

   머리를 다 깎고서 의자를 누였다. 면도 거품을 풀어 얼굴에 바른 뒤 온습포를 덮었다. 면도칼을 대기 전 마스크를 쓴 김 씨가 넌지시 말했다.

   - 면도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십시오. 미운 정도 정이랍니다 선생님.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이 눈을 떠 김 씨의 마스크 위 두 눈망울을 쳐다봤다.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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