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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17. 2024

톰과 제리 실사판

   두 달만에 다시 찾은 노인은 똑같은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시점에서 되뇌는 신공을 시전했다. 그제 일을 두 달 전에 나눴던 대화로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늙은것 운운하는 노인의 입버릇은 그저 레토릭일 뿐이다. 영악하기 짝이 없는 노인같으니라구.

   노인은 토요일 오후, 점방에 손님이 뜸할 때를 노려 입장한다. 늙은것이 머리털만 수북해서 성가셔 죽겠다는 말이 입에 달린 노인이 석달 전에 들렀을 때와 똑같이 커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깎새를 떠본다.

   "머리털 많은 것도 귀찮은데 허옇게 새기까지 해서 영 못 봐줘. 원장, 커트에 염색까지 얼만교?"

   "만이천 원이오."

   "집이 여기서 가차워요. 도로 건너면 바로야. 오늘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온 김에 염색까지 다 해 주소."

   토씨 하나 안 틀리는 상습범을 대하는 깎새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르신, 지난 번에 집에 가서 머리 감는 조건으로 이천 원 깎아 드렸잖아요. 또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동네에서 커트하고 염색 요금이 제일 싼 점방에다 대고 요금 깎아 달라고 하시면 저는 뭐 흙 파서 장사하는 줄 아십니까? 가뜩이나 염색약값까지 올라 부담스러워 미치겠는데 문디 콧구녁에서 마늘씨 빼먹는 것도 유분수지."

   실랑이 끝에 집에 가서 이천 원을 들고 오긴 했으나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마지못해 꺼내 놓고서야 겨우 염색을 할 수 있었던 두 달 전과는 달리 그제는 노인 우는 소리가 튀어나오자마자 아예 그 입을 틀어막아 버리는 깎새였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칭이 '선생님'도 '어르신'도 아닌 '아저씨!'였다. 오죽 반감을 샀으면 그럴까.

   "아저씨! 올 적마다 뭐하자는 겁니까.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하고 장난치자는 겁니까? 안 된다고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내가 호구로 보입니까?"

   그깟 이천 원 적선하는 셈 치고 안 받으면 그만이고 매상에 큰 차질을 빚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 교활함 때문에 부아가 치민다. 우선 노인은 깎새 점방을 들어서기 전 바깥에서 점방 안 동태부터 살핀다. 손님으로 북적거릴 경우 일하느라 정신사나운 깎새한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가 없을 성싶어 가급적 손님 뜸한 한적한 때를 노리는 치밀함을 깎새는 진작에 눈치챘다. 그 다음, 머리를 깎는 중에는 염색의 염 자도 꺼내지 않는다. 대신에 "늙은것이 머리털만 수북해서 성가셔 죽겠다"는 말만 줄기차게 재생한다. 그 언명에는 늙고 가진 것 변변찮은 노인이 머리가 허옇게 새 보기 민망하니 굽어살펴 달라는 밑밥이 깔려 있다. 그러다가 커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커트에 염색까지 얼만교?"하는 협상이 훅 들어온다. 타이밍부터 토씨까지 완벽하게 짜맞춘 한 편의 대본이면서 그걸 충실히 따르는 노인은 노회한 배우인 셈이다. 그 뻔한 간사스러움에 노인이 가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타임루프 영화를 찍듯 두세 달마다 똑같은 장면을 반복할지 모를 일이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커트와 염색을 기필코 관철시키려는 노인의 수작은 눈물겨울 테고 그걸 번번이 퇴짜를 놓는 깎새도 어지간할 게다. 선심의 여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나이값 못하는 노인의 행상머리가 바뀌지 않는 이상 톰과 제리 실사판도 불사할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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