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이 쓴 <어떤 경우>라는 시의 마지막 연은 시인이 서울 회기동 시장 골목을 지나다가 우연히 본 입간판에 영어로 쓰여진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 추가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길에서 시를 줍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시인은 어린아이가 툭 내던지는 한마디, 뉴스의 한 토막, 대중가요 가사에서도 시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밤하늘의 별이나 타클라마칸 사막,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 노을 지는 다도해, 연인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사이에만 시가 있는 것이 아닌 우리 주위에 시가 널려 있고 우리의 내면 곳곳에도 시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시를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대부분이 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랬다. 각박한 세상에,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 한가하게 시 타령이 가당키나 하냐는 반문이 당연하다. 그러면서 시인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이야기를 하나 꺼내든다.
수용소에도 티타임이 있었다고 한다. 몇 번 우려낸 형편없는 차였지만 하루에 한 번씩 차가 배급됐다. 티타임에 수용소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차를 단숨에 들이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차를 절반 남겨 얼굴이나 손발을 씻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동물적 본능에 충실했고, 후자는 ‘최소한의 인간적 체모’를 지키려 애쓴 것이다.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살아남았을까. 놀랍게도 후자 쪽의 생존율이 더 높았다. 브라이언 보이드가 쓴 <이야기의 기원>(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의 옮긴이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문재,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편>, 한겨레, 2016.03.11 에서)
찻물을 남겨 자기 얼굴을 씻는 행위를 자기성찰, 즉 시에 해당한다고 시인은 해석한다.
이 이야기는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보이드에 따르면, 시를 포함한 예술은 사치나 장식이 아니라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응의 산물이자 인간 생활의 핵심이다. 예술이 진화와 무관했다면 예술은 벌써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동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찻물을 아껴 자기 몸을 청결히 한 사람,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
우리는 태어날 때 누구나 시인이었다. 우리에게는 시의 마음이 있다. 우리가 돈에 눈이 어두워 시장전체주의의 미로 속을 헤매는 ‘영혼 없는 소비자’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있다. 시가 그 실이다. 시의 끈을 놓지 않으면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시가 희미해진 자존감을 되찾아 우리로 하여금 다시 꿈을 꾸게 할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소셜 픽션을 제안하면서 말했다. “꿈은 여럿이 함께 꿔야 더 크게,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시가 미래를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소셜 픽션이 될 수 있다.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를 상상해보자.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존감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확대될 때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다.(위 칼럼)
차 한 모금에 온몸이 녹진해지듯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매번 그러진 않지만, 이따금 그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건 시근이 좀 들어서일 게다. 미노타우로스 미궁처럼 오리무중인 인생에서 시가 '아리아드네의 실'이라는 시인의 표현이 참으로 그럴싸하다. 다만, 그 느낌이란 걸 가뭄의 콩 나듯 말고 매번 느껴보면 좀 좋으랴.
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 서울 회기동 시장 골목을 지나다가 우연히 보았다. 입간판에 영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To the world you may be one person, but to the one person you may be the world. -Bill Wilson